■ 不條理(부조리) 人生(인생)에도 주어진 삶엔 용감히 살아 - 金榮煥 神父
인생은 새로운 길도 아닌 길을 새로운 듯이 걸어야만 한다. 내일이라고 해서 다를리도 없는 길을 한없이 걷는 것이다. 내일에 어떤 약속이라도 한듯이 『내일은, 내일만은』하고 사람들은 보지도 못한 내일에 희망을 걸고 산다. 그 내일이 새해라는 이름에 싸여서 또 온다. 이러기를 몇번 하다가 우리는 가졌던 생명을 돌려주고 새것을 받는다. 그리고는 끝이 없다.
영원한 새해를 얻기 때문이다. 지난 한해의 일들을 생각해 본다. 슬펐던 일 즐거웠던 일 짜증스러웠던 일 그리고 흐뭇하기도 했던 일을 또 어떠했다고 규정지을 수도 없지만 어쨌든 어느 항에 속해서 지나왔던 일들.
판공 성사때 어떤 할머니의 고백이 이렇다. 고해소에 들어와서 묵묵히 꿇어앉아있기만 한다. 『죄 고하십시요』 『예?』 도무지 무슨 소린지 못알아듣는 모양이다.
『죄 고하시오, 죄』 『아 예 - 저 - 울산갔다가 왔심더, 딸래 집인데 막내 딸입니더』 그리고 또 묵묵하다. 그 할머니는 무엇이 죈지 또 어느 계명에 어긋나는지도 모른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종을 치니 성당에 오는 완전한 신덕(?)만은 가지고 있다.
얼마나 안타까우냐. 이것과 저것 사이에 끼인 인생. 기다란 목숨이 차라리 짧거나 굵었으면 하는 아쉬움 그래도 살아야만 하는 목숨이 불쌍하지마는 참노라면 그런대로 행복한 불행한 사람들.
그들에게는 슬픔이 가시는 날이 와도, 안와도 기뻐할 것도 후회할 것도 없다.
행복이라든가 불행이라든가를 단정짓는 것은 그들에게는 사치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산다는 것은 그 자체 죽음에 가까와지는 것이다.
사라져 가는 자기한테서 자아를 발견하려는 것은 삶에 대한 애착의 변명이다. 그 애착이라는 것이 또 완전한 불완전에서 완전하려는 어리석음이다. 이런 삶의 부조리에 타성이 되어버린 인간은 확실히 부조리 속에 살고 부조리를 부조리로 느꼈을 때 오히려 부조리로 느껴지도록 부조리화 되어버렸다.
이런것이 현실이고 현실 그 자체가 모순이다. 그리고 세상이다.
마른 모래에 물이 스며들듯 무엇이 가슴깊이 스며들었으면 하는 애절한 마음은 메마르기만 하다. 거친 땅을 헤치고 뾰족얼굴을 내밀자 말자 무심한 발길에 밟히고 마는 새싹의 안타까움. 그러나 강한 삶의 힘에 의해 해마다 봄을 맞고 그리고 그의 생명을 피워보는 것이다. 봄날 가만히 관찰해 보자. 좁은 벽돌 사이 「시멘트」 틈바구니에서도 생명은 솟아나고 있다. 결실을 보기도 전에 불타는 여름에 의해 떨어져 버릴 망정 주어진 삶에 대한 의무가 그를 용감하게 만드는 것이다.
정말 생명은 강한 것이다. 부조리와 불행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대자연을 통해 천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귀한 선물이다. 그리고 인간은 외롭다. 혼자나서 그리고 혼자 고요히 사라져야만 한다. 우리 인간은 별 값어치가 없는 가엾은 것이다.
그러나 선과 악을 아는 눈을 가졌고 고독을 거룩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천주께선 인간의 기쁨을 무엇 하나 물리치시지 않으신다. 다만 죄를 미워할 뿐이다.
인생이라는 무대위에 쓰여진 각본에 의해 움직여지는 우리는 본의 아니게 자신을 연출시킨다. 그러나 주어진 시간 안에서는 진실을 향하여 맹렬히 투쟁하여야만 한다. 새해에 새마음으로 우리는 새로운 길을 가보자. 가시로 인해 더욱 매력이 있는 장미처럼 인생에 슬픔과 외로움이 없다면 그리고 쓰라림이 없다면 인생은 무의미하고 지루할 것이다. 어제의 내일이었던 오늘을 맞아 우리는 하루에 충실하자. 사소한 일에서 커다란 평화를 찾자. 새해에 가난한 우리 형제에게 풍성한 강복이 나리도록 기구 드리자.
■ 또다시 띄워보낼 「욕망의 풍선들」 - 李貞美(대구 三德本堂 主婦)
時計의 내장 속에 같혀버린 톱니바퀴처럼 어쩔 수 없이 삶이 外廓을 벗어나지 못하고 어느새 이곳까지 밀려왔다. 그리곤 내 視野를 가로막고 있는 많은 삶의 內容들은 벌써부터 현기증이 날 지경으로 나를 위압한다.
그래서 더욱 어이없이 놓쳐버린 숱한 시간들이 아쉬워진다. 잇달아 오는 悔恨의 反추는 不隨意的 生理作用과도 같이 돼버렸다. 한해라는 주기적인 세월의 한토막 속에 우리는 자기나름대로의 욕망을 한껏 불어넣어왔다. 나는 한해라는 세월을 한개의 풍선이라 생각해 본다. 풍선은 공기를 充滿히 하고 허공으로 떠올라가버린다. 나는 풍선 속에 바람을 불어넣을 때 너무 탱탱하여 하마터면 터질번 할 것 같은 아슬한 직전까지 불어 넣어야 한다.
그래서 어떤 것엔 너무 많이 바람을 불어넣다 띄워보지도 못한채 탁 터뜨려버리고 마는 수도 있다. 그럴땐 여간 서운한게 아니다. 바로 그것은 어쩌면 不條理한 환경에 포용될 수 없는 좀 과욕한 의욕을 시도하다가 종내는 파국을 초래하고 마는 슬픈 慘狀과 같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의 새로운 풍선에 알맞게 숨모두어 불어넣는 어린애들 마냥 안간힘을 쓰고 희망(여러가지 욕망)을 불어넣는다. 이렇게 무수한 「애드배룬」을 띄워왔었다.
그러나 이같은 철없는 짓을 나는 후회해본 일은 없다. 무수한 색색의 「애드배룬」이 파란 창공에 하늘하늘 날아오르는 정경은 보기만 해도 여간 아름다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돌아오지 않을 풍선을 이 순간의 아름다움 때문에 자꾸 띄워왔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아이들 구멍가게에서 여러개의 풍선을 사서 나의 소중한 욕망(의욕)들을 잔뜩 채워 새해아침에 띄워올려야겠다. 이렇게 문득 동심의 세계를 더듬을라치면 한가지 생각나는게 있다.
내가 국민학교 다닐 때 미술시간에 배부받은 공백의 도화지 위에 畵題가 自由選擇된 그림을 그리려 할 때 未知의 작은 우주에 대한 설렘과 망설임 하던 마음은 바로 한해를 보내고 새로이 한해를 맞아야 하는 이 문턱에서 번번이 感得하는 것이다. 높은 하늘에 떠가는 흰구름인양 당신은 희고 아름답고 아득합니다… 헷세의 白雲賦가 아니라도 하늘에 계신 높으신 이의 뜻과 사랑을 알고 숨쉬기엔 우린 정말 아득하기만 한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주저치 않고 내가 마련한 마음의 餘白에 그 분의 모습을 뜻 모두어 조심스레이 기다려진 不可知의 시간 속에서 애써 그려볼 작정이다. 그리고 딴딴한 外皮 속에 단단히 목을 움추리며 自己를 固守하는 거북의 형상은 호나경의 卑俗作用에 쉬이 同化돼버리고 마는 자신을 고요히 維持하고 가스림 하는 나의 모습인 양 하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