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젠 「포도밭」으로 / 이천수(光州大敎區)
사람은 보통으로 무슨 일을 시작할때에 그 일이 크고 중대할수록 그 설계며 포부를 원대하게 찬란하게 갖는다. 나는 이제 칠개성사의 학구생활을 떠나 성직에 나서서 주님의 포도밭으로 일하러가는 마당에서 나대로의 찬란하거나 또 자랑스런 꿈과 함께 힘찬 출발이 없으란 법은 없다. 더군다나 성직이라면 직접 천상으로부터 받은 권, 지상의 어떠한 일보다 훨씬 뛰어나게 고상하고 높다 하겠다. 천주님으로부터 그 권을 받지 않는다면 뉘라서 사람의 죄를 사하며 주님의 몸과 피를 이루어 제사를 봉헌하겠는가?
그러나 나는 자랑보다는 부끄러움이 더 많고 탓할것뿐인 사람, 초라한 어부들을 제자로 삼으시고 교회의 초석과 기둥이 되게 하신 주님의 지혜와 인자를 감탄하면서 또한 나의 바보됨을 자랑으로 삼아주시는 스승께 마음 다하여 찬미와 감사를 올리는 바이다.
그러기에 나는 오히려 설계도 포부도 없이 나설판이다. 그래야만 주님의 원의에, 어떤때는 지시에 가장 잘 순응할 수 있을 것 같다. 충직한 종은 주인이 원하는 일을 주인이 원하는 대로 했을때 주어질 수 있는 칭송의 이름이 아닐까? 어젠가 누가 나더러 기왕이면 알찬 사제가 되라고 일러준 적이 있다.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내려고 노력은 했으나 아직도 자신 있게 알지는 못하고 충직한 종일거라고 생각해두었다.
주님의 뜻이 어른을 통하여 표현될때, 아무런 여지없이 그대로를 따라서 일할 수 있기 위하여 성직의 시작에 있어서 빈손으로 나서겠다.
내가 가는 포도밭은 기쁨보다는 슬픔이, 그리고 안일보다는 고통이 더 잦고 벅차는 세상이라면 나도 스승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 영혼을 찾아야 하리라.
얼마를 아느냐보다 얼마를 이해하느냐가 더 중요하다고 한다. 천주의 말씀을 전하고 성사를 집행하는 것도 중요하고 이건 나의 천직이겠지만, 요사이 같은 메마른 인정과 각박한 세상에서라면 마음과 처지를 이해하는 것이 더 우선적이고, 중대할지도 모른다. 사람은 흔히 영(靈) 보다는 육(肉)이 더 바쁘고 앞서기 때문이다. 마음으로 통할 수 있고 거리 없는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원해본다. 즐거움 중에는 더 큰 기쁨을, 슬픔 중에는 위로와 힘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
■ 眞正한 對話를 / 金順鎬(大田敎區)
새 신부로서 사회로 발을 디디는 마음이 어설프기만 하다. 그저 평면적인 생활속에 자신의 의식마저 잊으며 살아온 내가 사회에 대면할 것을 생각하면 험악한 준령이 가로놓인 듯 눈앞이 캄캄 해진다.
사실 신학교를 나오면 신부가 된다는 것이 지상목표였기 때문에 그 외의 어떤 분야에 대한 의혹도, 모험도, 야심도 없이 신부만 되면 모든 일이 손쉬울 줄로만 알았고 타분야를 생각할 필요성마저 느끼지 못한채 항상 남이 하는 것을 않는다는 것으로 특색을 지어온 나다. 그러나 이왕 넘어야할 산이라면 지금에 와서 주저할 수는 없다.
누구나 새 신부로서의 이상이 있겠지만 나로서의 꿈이라면 마음을 어디에 붙이지 못하고, 불안과 공허속에서 고민하는 인생들과 이야기나 해보고 싶다. 내가 원하는 생활을 왜 택했는지를 나만이 간직한채 이들과의 대화는 한낱 기계적인 것에 가까울 것이다.
내가 설곳에서 평범한 인간으로서 그들의 갈증을 같이 느끼며 서로 하고 싶은 말을 주고받으며 슬픔이나 근심을 서로 털어놓는다면 슬픔은 반감되고 기쁨은 곱배가 될 것이다.
사실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같다. 이야기를 실지로 나누어보면 신자이건 비신자이건 인간의 마음은 같고 모두 위안을 얻으려는 심정은 변함이 없다. 대화란 서로 이야기하는 것일진대 묻고 대답하면서 자연스럽게 각자의 생각이나 심정을 교류함으로써 서로를 이해하고 이로써 기쁨을 맛볼때는 솟구치는 감사의 정과 더불어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어봤으면 하는 생각이 일어나는 법이다.
우리는 자신의 행위에 책임을 지는 것이 다를뿐 하나님 자녀로서의 존엄성에 있어서는 똑같다. 대화란 동등한 입장에서 서로의 마음을 합치하는 것이 중요하다.
교종께서 그 회칙에 주로 대화라는 「테마」를 취하시고 이를 강조하시는 바는 현세계의 급격한 변천속에 처한 교회의 사명을 위해 다면적인 대화의 필요성을 느끼신 때문이다. 자신이 위치한 자리에서 주의 증인으로서 신자거나 비신자와의 대화는 현교회의 친세계성(親世界性)에 적극 협조하는 것이며 이것이 천주의 뜻을 채워드리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교문을 나가는 우리 풋 내기들의 의욕은 일을 해보겠다는 마음의 생리일 것이다.
■ 十字劇의 主演들?
천주님의 창조와 구속사(救贖史)를 「십자극」이라하여 옳을 건가? 그리스도의 권한을 대리하는 사제들을 십자극의 주연들이라하여 모순 일까? 학창생활의 막바지를 보내면서 나대로의 생각을 해본다. 원대한 계획아래 이 대극(大劇)의 각본을 작성하신분이 성부지요, 주연으로 연출하신분이 곧 성자이시며 총괄적으로 감독하시는 분이 성신이시다. 성부의 뜻밖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없고 그리스도의 구속공로를 받아 입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가는 이 없으며 성신이 교회내에 거하시며 통치하시기 때문이다.
십자극은 3막으로되어 있다. 제1막의 무대는 구약 시대며 주연들은 아브라함, 이사악 모이세 등 선지자들이었다. 제2막은 이극의 본막으로서 신약의 무대이다. 요안세자, 성모마리아, 그리스도 그리고 사도들이 주연으로 나온다. 특히 천주이신 그리스도는 인간의 그릇된 오심(誤審)으로 십자가의 죽음을 당했다. 이분들은 연기상을 천상에서 받았다. 마지막 막은 천하만민이 한자리에 모여 심판하는 성대한 막이 닫칠 것이다.
십자극이 아직 계속된다면 나도 한장면을 꾸미고 있지 않을까? 그리스도의 전권을 받은 교황 주교 신부들은 이 십자극의 주연들이라 믿어진다. 전력을 다하여 연기할 때는 왔나보다! 목자역을 맡아 십자가를 지고 삼구전(三仇戰)의 일선에서 싸워야할 역을 맡았다. 33명의 새 어부가 쏟아져 나온다. 배를 타고 고기 잡을 일군들이다.
암흑에 등불이 되어야 할 빛들이다. 남을 위한 자신을 불사르는 촛불들이다. 복음의 씨가 되어 썩어야할 밀알들이다. 연기의 결과는 노력에 달려있고 각자의 연기상은 천상에서 받으리라. 목자는 양의 상태를 알아야 하리로다.(요왕 10·14) 십자가의 죽음에는 생명의 포기가 있어야 되리로다(요왕 10·15)
승리하기에는 그리스도로 무장된 군인이어야 하리로다.(로마서 13·14) 고기잡이에는 감화력이, 등불을 켜기에는 기름이 있어야 되리로다. 촛불은 모말밑에 있어서는 안되리로다.(마두 5·15) 최고의 배우인 그리스도의 정신을 따르는 사제들은 시련된 연인(演人)들이어야 하리로다. 시대의 무대는 점점 발전하고 새시대는 새「타입」의 사제들을 요구할 것이다. 나를 통한 천주의 십자극이 뜻대로 성취되기를 노력하겠다.
■ 信者들의 徒 / 李判石(大邱大敎區)
오늘 나는 생명을 즐거히 바치기까지 고통받는 야훼의 종으로서 일생을 봉사하신 착한 목자의 제자되는 영광을 받았다. 그러면 이제부터 내가 가야할 길은 무엇인가? 생명까지 아쉬워하지 않고 봉사하는 종 이것이다. 스승이 봉사하는 종이었다면 그의 제자인 나는 종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누가 나의 이름을 묻는다면 종이라고 답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생명의 주인은 교회이며 믿음의 제형들이 나의 상전이 된다.
이 하나의 생명을 바쳐 많은 이가 생명을 얻고 또한 풍성히 얻을 수 있기에 더우기 장차 나타나실 이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는 보장을 받고 있기에, 고통의 쓴잔인 희생도 순종도 달갑게 받을 수 있으리라.
그러나 『내 탓이요 내 탓이요 내 큰 탓이로소이다』 가슴을 치면서 주의 자비를 간구해야 하는 약점과 허물을 지닌 아담의 후예인지라 종의 신분을 망각하고 특권의식에 사로잡혀 주인행세를 하여 주종이 전도되는 웃지못할 희극을 연출 아니 하리라고 누구가 보장할까? 주어진 소명(召命)의 숭고함과 인간적 약점을 비교하여 절망아니 할 수 없음은 오직 나만이 느끼는 것일까?
오늘 서른셋 우리 모두가 한결같이 느끼는 점이 있다면 바로 이것이리라. 어떻게 할까? 요나선지자 처럼 자기의 사명이 두려워 도망해 버릴까? 그러나 이십여세 약관의 몸으로 서품된 티모테오에게 격려와 용기를 주었던 말씀이 있으니 『안수로써 그대안에 있는 천주의 성총을 기억하라』 바오로 종도의 이 마지막 유언이 두려움과 실명에 차있는 나에게 신뢰와 희망을 가지게 해 준다. 이 말씀은 신품성사로써 주어지는 성총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항상 내재하는 영존성을 지닌다는 뜻이다.
이제 안수로써 내영혼안에는 언제나 분출하고 풍요한 성총의 원천을 받았으니 복음을 위해 괴로움을 즐거이 받을 수 있으며 착한 목자께서 걸어가신 형극의 길을 따라갈 수 있으리라.
때를 따라 식구들에게 성총의 양식을 나누어 줄 충직하고 지혜로운 종의 사명을 다 하기에 어렵지 않을줄 믿는다.
바오로 종도와 같이 십자가를 지는 것을 최대의 영광과 상급임을 확신하면서 착한 싸움을 싸우며 달릴 길을 끝까지 달리는 것만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