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姜元龍 牧師 (基督敎 長老會 總會長)
敎會一致(교회일치) 聖書(성서)의 基本命令(기본명령)
敎派(교파)의 傳統信條制度(전통신조제도)는 2次的(차적)
교회의 일치는 성서의 至上命令인 동시에 오늘 우리가 사는 時代의 준엄한 요청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임을 믿고 모든 信徒가 그 지체라는 것을 믿는다면 교회의 일치를 회피할 길은 없을 것이다. 하물며 프로테스탄 교회가 聖書의 地上權威를 인정하는 한 이 聖書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자 요원의 불길같이 일어난 「에큐메니칼」운동은 어떤 時代的인 요청에 앞서 聖書의 명령에 순종하고자 하는 회개의 행위이며 信仰告白의구체적인 표현이었다.
各 교파가 지난 전통이나 信條나 制度가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없으나 그것을 절대화하여 聖書의 基本命令을 거부하는 소재를 삼을 수는 없다는 자각이 서로의 다른 전통이나 敎理를 존중하면서 다양성을 지닌 一致(DIVERSITY IN UNITY)를 原理로 삼고 세계교회협의회(WCC)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불꽃은 교회의 본질에서부터 시작된 것이기는 하나 기술 혁명과 사회혁명이 닐어나고 있는 오늘의 세계정세가 이 붗꽃에 부채질을 하며 보다 더 급하게 퍼지게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국의 프로테스탄 교회는 그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체질에다가 특수한 社會的인 情況 때문에 이 운동에 호응하는 자세가 매우 미약했다. 現在도 그 조직기구로 보아 이 WCC를 異端視 하거나 혹은 의구심을 안고 바라보는 세력이 매우 强하다. 표면에 내걸고 있는 이유는 新神學이니 容共이니 하는 것이지만 WCC가 새로운 神學을 만들 理도 없고 그 자체가 내세우는 정치사상이 있을 理도 없다. 다만 교파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해온 그 體質을 改善해 내지 못하는데 原因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失望은 하지 않는다. 10年前과 오늘을 비교해 볼 때 놀랄말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 사실이다. 10年前만 해도 이와같은 교회의 일치를 부르짖는 사람은 例外없이 異端者가 아니면 매우 위험한 存在로 취급받았고 또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의 數는 極少數에 속했다. 그러나 오늘에 와서는 오히려 이러한 일치운동을 반대하는 사람이 극소수가 되어버렸다.
오늘 한국 교회에서의 一致運動을 지향하는 사람들은 이제부터 매우 어려운 과제에 부딪치게 된다.
한편으로는 보수적인 교회지도자들과 꾸준한 대화를 통하여 선교와 봉사에 있어서의 共同ㄱ솨제를 모색해야 한다. 이런 일을 위해서는 구태여 국제적으로 WCC니 ICCC니 하는 국제기구와의 관계는 論外로 하고라도 국내적으로 NCC니 NAE니 하는 연합단체를 전면에 내세우지 않아도 좋다. 결코 이러한 단체들을 무시하거나 그런 것과의 관계를 끊으라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런 단체와의 관계를 내세우는 한 대화의 길이 끊어질 염려가 있고 또 그런 단체와의 관계를 갖지 않고서도 너무나 많은 화제가 있기 때문에 먼저 서로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 않고 미끄러운 對話와 共同行動할 수 있는 일부터 찾아보자는 것이다 이런 노력을 계속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가톨릭교회와이 유대를 강화하는 노력을 해야한다.
가톨릭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서로 다른 근본적인 문베두터 솔직하게 토의해 보는 것도 한가지 방법일는지 모르나 우선 서로가 곹옹되는 점부터 찾아서 聖徒의 교제를 實現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먼저 「코이노니아」(교제)를 실현하고 나아가서 「디아코니아」(봉사)의 광장을 찾아서 든든한 터닦이부터 하고 거기서 차츰 서로 닮은 점을 찾아 그 해결을 모색하는 노력을 해야할 줄 안다. 기러한 일은 우리 교회가 일반적으로 지니고 있는 體質로 보아 매우 어려운 일임을 잘 알고 있으나 돌이켜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성령(성신)의 능력과 세게적인 큰 물결을 고려할 때 매우 밝은 전망을 가질 수 있다. 더욱 오늘에 와서 우리의 선교와 봉사의 대상이 되는 한국사회의 病理와 전 민족이 힘을 합하여 완성하지 않으면 안될 近代化 民主化와 民主的 統一의 과업까지 고려해 보는 때 우리들의 差異를 지나치게 확대하여 「에너지」를 分散한다는 일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조심스럽게 그러나 시기를 놓치지 말고 과감하게 교회의 一致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 尹聖範 牧師 (감리교회 목사, 감리교 신학대학 교수)
프로테스탄 敎派間(교파간)의 一致(일치) 先行(선행) 後(후) 各敎(각교)의 神學對話(신학대화) 해야
현대 그리스도교회에 있어서이 교회일치 운동은 하나의 무상명령과 같이 알고들 있읍니다. 그리하여 덮어놓고 합하는 것만이 교회가 사는 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이 있읍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는 이것을 낙관하기 보다는 되려 비관하는 인사들도 만이 있는 것 같습니다.
소위 박애주의 연하는 크리스챤들의 일부는 교리고 신학이고 고려할 것이 무엇이냐고 생각하고 덩어리로 만들어 버리자는 급진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많이 있읍니다.
넓게 우리가 교회 일치를 말할 경우 무엇보다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이 가장 큰 문제이라고들 하고 있읍니다만은 그것보다도 더 큰 문제는 프로테스탄 자체 내에 있는 여러 군소교파들의 분열인 것입니다. 같은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는 교회끼리도 단합이 되어 있지 못하다고 하는 것은 교회일치 운동의 큰 암이 아닐 수 없읍니다. 여기에는 교리의 상이점 보다는 개인 개인의 주장이 상이와 감정, 지방색, 개인적인 이해관계, 소속된 각개 선교부와의 관계 등으로 인해서 하나의 「칼빈니즘」이라 할지라도 갈라질 수 밖에 없게 되어있는 형편입니다.
우선 프로테스탄과 가톨릭교회가 일치운동을 전개시키기 전에 해야할 프로테스탄 교회 자체내의 과업이 있읍니다. 이것이 곧 다름아닌 여러 군소 교파와의 새로운 관계와 정비라고 볼 수 있읍니다. 프로테스탄 일부와 가톨릭교회 전체와의 일치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위스 「즈네브」에 있는 세계교회운동본부(WCC)에는 「생활과 봉사」라는 국 이외에 「신앙과직제」라는 또 하나의 국이 있읍니다.
이,것은 각 교파가 가지고 있는 신앙고백과 신학적인 제반문제들을 연구하여 따라서 교회제도에 대한 연구도 함께 취급하여 진행시키고 있는 분과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때까지 그리 큰 관심을 가지지 못하고 내려온 분과인지는 모릅니다만 이것이 가장 큰 의의를 지니고 있다고 전느 보고 있읍니다. 프로테스탄 자체내에 있어서도 각기의 다른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는 이상 이것이 마음 속에 양심적으로 해결되기 전까지는 일치란 단순히 허울 좋은 구호에 지나지 않을 뿐 별반 실질적인 소득은 없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이러한 수박 겉핥기의 일치는 아무 의의도 없으며 설사 있다치더라도 그것은 정치적인 성과 밖에는 거둘 수 없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그러므로 교회일치는 무엇보다도 먼저 신학적인 이해가 선행되어야 디겟다는 것입니다. 신학이란 단순한 이론이 아니요 시앙고백의 학무님으로 이 신학적인 해결을 우선 근거로 해서 침목도 할 수 있고 양적(量的)인 포섭도 가능하리라 믿는 바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양적인 포섭을 통해서 팽창해가는 세속주의를 막으려 할지라도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이 싹트고 이것으로 인해서 생명이 유기적으로 확대해 나가는 것이 아니고는 우리가 크리스챤이라 하더라도 이 크나큰 세속주의의 조류를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없는 양적 확대는 마치 홍수가운데 떠내려가는 큰 뗏목에 비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생명적인 통일 유기적인 통일이란 곧 신앙적인 아니 신학적인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일치의 사실을 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 양심이 문제입니다. 그렇다 하면 이렇게 신앙이 양심적이라고 해서 개인개인이 가지고 있는 신앙적인 양심이 반드시 객관적인 하나님의 뜻이거나 그리스도의 마음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내 양심으로 이렇게 믿는다는 이 사실이 하나님의 뜻이나 그리스도의 마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자기반성이 필요하게 됩니다. 이것은 물론 하나님의 말슴인 성경으로 돌아가서 다시금 상고해 봐야 될 문제이겠읍니다. 그래서 나 개인의 양심, 내 적은 교파의 신앙 고백이 과연 그리스도의 마음에 일치되는 것인가를 다시금 검토해야만 되겠읍니다. 이것이 곧 다름아닌 신학적인 작업이라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교회일치는 그리스도의 뜻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맹목적인 합치나 혼합은 그리스도의 뜻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개인이나 개체 교파의 신앙양심은 중대시 되어야 되겠읍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목표는 하늘나라입니다. 이 공동체를 지향해 나가는 것이 교회일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교회일치운동은 하나의 종말론적인 사실이라 할 수 있겠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