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주성범 眞作者(진작자) 구로떼의 悲劇(비극) 下
억울했던 修士(수사)
벽지로 引退(인퇴) 후 悲嘆(비탄) 속에 쓴 第(제) 2·3卷(권)
內心(내심)의 啓示(계시)로 試鍊(시련)의 一切(일절) 참아내
中傷(중상) · 挫折(좌절) · 버림받아 불가피한 고독에 이르렀으나
고민 · 위안의 交替(교체) · 人性(인성)과 聖性(성성)의 攻防(공방)의 갈등 그려
강론 禁止令(금지령) · 著書(저서) 맹공격 받고
숨진 即後(즉후) 로마서 覆審判決(부심판결) 到着(도착)
(承前)
그러는 가운데 1383년에 이르러 그는 느닷없이 苦難에 부딪쳤다. 그것은 「우트레히트」의 主敎가 그에게 講論禁止令을 내린 일이었다. 동시에 그의 著書 「靈交하는 現代信心」이 격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냉담한 수도자들 용렬한 성직자들은 승리하고 그는 主敎의 명령을 들어 전교를 그만두었다.
그러나 그는 「로마」의 敎宗에게 上訴하여 자기의 사명을 계속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때 그의 마음은 悲痛의 극도에 다다랐으며 하는 수 없이 궁벽한 지방에 引退하게 되었다.
그1년동안 적은 日記가 第2卷 第3部에 실려있다. (라띤本 卷3)
그러면 그의 「現代信心」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와 靈性交際를 맺기 위해 內修하는 사람이 되어 먼저 自我로 돌아가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世俗을 떠나 _我하고 스스로 靈性善業에 _心함으로써 자기의 영혼 안에 現存하시는 天主의 소리를 듣고 영혼과 天主 사이의 對話를 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信心」은 무슨 推理的 장편 論文이 아니라 內修에 실천될 수 있는 格言과 영혼에서 요구되는 교훈에 불과한 語錄이었나 西班牙의 詩僧 「十字架의 요왕」 聖人이 受辱(崔민순 신부의 시집 참조), 獨逸의 禪修士 에크하르트의 受斥(日本 가톨릭 大辭典 참조), 아울러 「現代信心」의 구로떼의 受難에는 서로 다른 2次的인 與件들이 있을 것이나 3者가 다 神의 內在性을 靜觀할 수 있는 神秘家들이었다는데 1次的 인 共通性이 있다고 보인다. 그것은 神의 超越性一邊으로만 기우는 思考는 抽利的 論理의 범주를 벗어난다던가 또는 言行이 非正常的으로 보일때 서로 어울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費論理的이나 直觀的인 逆說을 恒用하는 東洋 道人(自然神秘家)들의 말투에 젖은 東洋의 知性에게는 그리스도교 신비가들 안에 以心傳心 되는 共通性이 自在함에 留意하는 것은 無用한 짓이 아닐 것 같다. (「東西의 彼岸」 및 「內心樂團」에 보이는 老莊 및 佛禪에 관한 部分 참조) 구로떼는 여기(라띤本 卷三)서 자기가 겪어온 과정을 다시 전개한다. 讀者는 章마다 그가 받은 시련을 암시함을 볼 수 있다. 그는 이 모든 암시를 통해 자기가 느껴 받은 光照, 慰安 그리고 天主의 忠儀으로서 一生을 분투한 과정을 골고루 독자의 눈 앞에 再演한다. 그도 역시 여기서 因難을 완전히 참아 받기란 참으로 어려움을 깊이깊이 느기고 있다. 그러나 天主께서 그의 마음 속에 계시어 그에게 지시하심을 따라 자기의 죄 때문에 고통을 달게 받고, 천주를 信賴하고 世上은 信賴하지 아니하고, 곁에 있는 사람들의 中傷을 돌아보지 아니한다. 天主께서 그에게 唯一한 갚음이 되신다. 천주께서 실지로 그를 慰安하셨고 또 慰安하실 것이었고 자만심이 못나게 하셨다.
그는 천주께의 사랑을 위해, 천주의 顯揚을 위해 스스로 낮추어 겸손히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고민과 유혹을 참아 견디었다. 아무런 위안도 없을 경우에도 그는 이내 끝까지 참아, 자기에게 대한 천주의 조치를 따지지 않았다. 그토록 그는 자신을 버렸고, 원수를 갚지 아니하고, 반항하지 아니했음은 천주와 一化되어 천주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함이었다.
이 內心의 啓示가 그로 아혀금 굳건히 一切를 참게 하였다. 그가 바라던 유일한 은총은 곧 天主께서 지시하신 길을 걸어 幸福의 彼岸에 이르러 막바로 天國에 들어감이었다. 이것을 보면 그의 日記는 事實에 근거를 두고 영혼이 超越해서 上昇하는 經路 곧 完全無我의 정점에 이르는 路程을 讀者에게 그려 보인 것이다. 다만 그가 이러한 境地에 다다르기에는 苦痛스런 분투, 고민과 慰安의 交替, 人間 「本性」과 天主 「聖性」 雙方의 攻防을 겪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다.
몸소 그러한 境地를 겪은 이만이 비로소 이와같이 生生하게 表現할 수 있는 것이다. 틀림없이 이 「FOLLOWING OF CHRIST」의 著者는 자기 친구의 벌임과 남의 中傷을 받았으며, 노력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挫折에 부딛쳤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쓸쓸하고 외로운 境地에 이르른 것이었다.
1384년에 和蘭에 猛烈한 黑死病이 流行하여 死亡者가 무척 많았다. 구로떼의 會에 속하는 많은 兄弟들이 거의 다 그 병에 걸릴번 했으나 그는 精通한 醫術로 沈着히 救護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가 어느 兄弟 하나를 看護하다가 자기도 傳染을 받았다. 그가 看護해 주던 사람은 살아나고 자신은 이해 8月末에 世上을 떠나고 말았다. 臨終時에 그는 그 會의 兄弟들을 앞에 불러다가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兄弟들이여, 그대들은 天主를 信賴하라! 世人을 두려워하지 말고 그대들의 결심을 단단히 지키면 天主께서 그대들을 뒷받침하실 것이다. 天主의 조치를 사람이 바꿀 수는 절대로 없다. 내가 내 소원대로 天主의 곁으로 갔을때, 내가 꽃비를 내리면 그대들은 곧 天主의 은총과 이 은총과 더불어 여러가지 效果를 느낄 것이며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셀 수 없는 아름다운 열매를 거둘 것이다.
그는 자기가 맡은 慈善事業을 위해 몸을 바쳤으며, 자기의 兄弟들을 위해 목수을 바쳤다. 그가 傳敎하기를 請願한 上訴에 관한 羅馬 敎宗의 回答은 숨질때까지 오지 않았다. 자신을 반대하고 그가 가르친 信心과 그가 세운 修道會에 대한 풍파가 그가 죽은 뒤에 오히려 더 불타올랐다.
그의 가장 열렬한 소원은 傳敎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은혜를 베풀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天主께서 그렇게는 規定하지 아니하시고 그의 日記와 권면으로써 보다 큰 效果를 거두게 하셨다. 그는 「忘我」로써 위안을 얻기를 원했다. 그는 이름이 나지 않는 生活을 원했기 때문에 오랫동안 그의 이름을 아는 이가 없이 그의 日記를 처음으로 번역한 토마스 아 켐피스가 그가 받아야 할 榮譽를 대신 받았다. 토마스 아켐피스는 자기가 책을 지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동시에 原作者의 이름을 밝히지도 아니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신중을 기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토마스 아 켐피스는 이 책마저 구로떼의 원수들의 공격하는 목표가 되지 않도록 함이었다. 그러나 原文의 순서를 바꾸고 딴 글을 보탰기 때문에 日記로서의 本來面目이 많이 손상되었다. 和蘭문 原稿는 J. 환 진네켄 신부가 출판하였으며 그것을 英譯한 분은 J. 말래이즈 신부님을 덧붙여 이 FOLLOWING OF CHRIST가 國譯新刊되어 「준주성범」이 더욱 빛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그런데 구로떼에게 전교를 허락하는 羅馬의 判決이 도착했을 때는 그가 숨을 거둔 即後였다고 한다. 아이고! 아이고! (끝)
金益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