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국외를 막론하고 교회일치의 문제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숭고한 현세기의 당면과제이다. 따라서 지난 몇해동안 교계이 논제가 주로 이것이었고 앞으로 역시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적인 긴급한 요청은 그것이 갖는 중대함만큼 대로도 적지 않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는 근 1천년의 역사적 암덩어리가 불과 하해 두해에 없어지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고질이 된 질환이면 그 치료의 기간도 어느정도 예상해야 하고 수술의 고통도 감내할 각오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이와같은 각오와 노력 없이 이 시대의 영광스러운 그 사명을 수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이 시대의 지고(至高)한 사명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극복해야 할 애로와 난제(難題)들은 주로 어떤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 우선 교회일치란 무엇인가에 대한 개념규정부터 해야할 것이다.
다시말하면 우리가 바라고 실현하고자 하는 교회란 어떤 것인가를 먼저 알아야 할 것이라는 말이다.
온르날 교회일치운동이니 「에쿠메니칼」운동이니 하는 말이 너무도 흔히 사용되고 있지만 정말 「에쿠메니칼」운동의 성격을 옳게 이해하고 말하는 것인지는 의심스럽다.
「에쿠메니칼」 운동이라는 것이 무조건 외형적 기구의 획일이거나 혹은 단순한 이념적 일치의 모색일 수는 없다. 교회는 한 몸이신 그리스도의 산 지체임을 구현하는 것이다. 한 몸이신 그리스도는 각각 분리된 여러개의 조각들로 된 연결체가 아니다. 여러개의 조각들을 연결했거나 붙여놓은 것이라면 인형은 될지 몰라도 살아있는 몸 곧 그리스도의 부활체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자들은 거의 인형 작업 같은 노력을 「에쿠메니칼」 운동인양 이해하는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에쿠메니칼」운동이라면 「WORLD COUNCIL CHURCHES」이라는 명칭에 이의(異議)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대문자로 표시되는 교회가 복수로 씌어져야 한다면 벌써 예수의 몸은 살아있는 몸이 되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열띤 운동을 전개하고 조직을 철저히 해도 그 운동의 속 생명은 벌써 땅 속에 묻혀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필자가 세계교회협의회의 활동을 조금이라도 과소평가하거나 그릇 인식하는데서 하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WCC의 정신과 그 노력이 더욱 옳게 평가되고 더욱 빛나는 성과를 가져오도록 바라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바 1948년에 처음으로 「암스텔담」에서 대회를 가지고 출발한 WCC이 기구는 천주교를 제외한 거의 모든 교파들을 포함하고 있다. 거기에는 철저히 개신교계(改新敎系)(의 교회들도 들어있지만 종교개혁 이전의 전통을 존중하는 가톨릭교회도 있는 것이다.
희랍정교회를 위시하여 수리아계의 고(古)가톨릭교회와 성공회도 있으며 이들의 전통을 지지하는 스웨덴교회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WCC의 운동은 그 20년의 실적 여하를 불문하고 근본적인 그 성격에 있어서 철저히 「에쿠메니칼」 교회를 위한 운동인 것이다. 「에쿠메니칼」교회란 앞에서 잠간 언급했지만 여러교단의 이름들을 꿰매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정말 교회통일이라면 프로테스탄 교파들만의 회집(會集)을 위한 것일 수가 없다. 그들만의 연합적 회합을 통해서도 그들 상호간에 조성된 긴장을 어느정도 완화하거나 해소시킬 수는 있다. 그러나 정말로 완화시키고 해소시켜야 할 것은 교회를 손상시킨 그 근본원인을 발견하여 제거하는 노력이다.
그것은 다름아닌 종교개혁에 직결된 문제이다. 교회일치를 위한 노력을 구하면서 교리적인 문제를 논급한다는 것은 당면한 교회일치운동이 종교개혁 이전과 그 이후의 양 전통을 연결하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이다. 전자는 물론 사도들과 교부들의 전통을 바로 이어받는다는 일이요, 후자는 성서의 현대적 이해를 위한 노력을 말한다.
전자의 경우는 분열의 위험이 적은 대신 외형적 및 외부적(注入的) 획일성에 빠져 내용인 복음의 의미를 상실하기 쉽고 상징 속은 표현수단이 그 궁극의 의미를 대신하는 위험이 있다. 그와 반대로 후자인 종교개혁 이후의 전통 다시말하면 「프로테스탄티즘」의 경우에는 복음 혹은 진리 정신에 입각하여 열심있는 신앙을 가질 수 있지만 그 신앙의 표현이 너무도 무질서 하기 쉽다. 개혁이후의 교회에 있어서 분열을 면치 못하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새삼스럽게 재론할 여지도 없지만 신의 창조적 질서는 모두가 의미와 그 표현을 미묘하게 연결지은 것이다. 표현의 수단 없이 의미를 알 수 없고 또한 의미가 있으면 거기에 자연스러운 표현을 동반하게 마련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의 기능도 옳게 이해해야만 우리의 교회일치운동도 효과적으로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한국교회의 실정은 어떠한가?
좀 섭섭한 말이지만 우리나라에서의 「에쿠메니칼」운동이란 거의 일방적인 이해가 아니면 무조건 경계하고 반발하는 기세에 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요즘은 WCC를 비롯한 국내 국외 교회의 통일운동에 대해서 어느정도 이해가 진전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이해와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거의 이해라는 말로는 통해질 수 없는 분들도 적지 않다. 좀 웃으운 말이지만 반 「에쿠메니칼」파가 있다는 이야기다. 반「에쿠메니칼」파가 있어야 할만큼 그 상대측이 「에쿠메니칼」운동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도 충분히 성립될지 모르지만 여하간에 「에쿠메니칼」반대파가 있다는 것은 확실히 그 귀중한 용어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
「에쿠메니칼」의 그 원뜻은 쉽게 말해서 한 집안 한 울타리 안에서 서로 화목하며 살자는 것이다. 이것을 반대한다는 것은 이상할 정도의 기벽(奇癖)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는 지금 이 긴장이 개신교 안에서 풀리지 않고 있으며 사실상 이것이 원인이 되어 교회일치를 위한 노력에 상당한 방해를 주고 있다.
이제 끝으로 우리가 해야할 일은 간단히 덧붗여 보려고 한다. 우리가 성취해야 할 교회, 구체적으로 말해서 통일된 한국교회를 실현하기 위해 해야할 일은 참말로 허다하다.
허다하다기 보다도 복잡할 정도로 많다. 그러나 그것들을 여기에서 논할 수는 없고 또한 그럴 필요도 없다. 다만 한 두가지 그 구체적인 소원을 말한다면 우리 한국교회는 개신교, 가톨릭교를 불문하고 우선 한국이라는 지역성(LOCALITY)의 개념을 명기해야 할 줄 안다.
같은 한국역사와 풍토에서 형성된 우리 한국인이 어느 한 교단에 소속되었다고 해서 꼭 그대로 모방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사실상 현대의 교회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토착화 문제도 이런 점에서 더욱 철저히 연구하고 검토하며 실현해야 할 것이다.
다음은 그 노력을 종합하고 조직하여 살려내는 수단으로서 한국의 교회통일연구기관 같은 것이 현실적으로 구성되었으면 좋을 것 같다. 종래에는 좌담회나 혹은 지방 순회의 강연 정도로써 「에쿠메니칼」운동의 초보적 분위기를 조성해왔지만 앞으로는 좀더 적극적인 유형의 수단 혹은 기구를 만들어 이용했으면 좋을 것 같다.
하느님의 뜻이 우리의 이 간곡한 소원을 용락하셔서 축복해 주시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李天煥(聖公會) 주교(성공회 서울교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