敎會(교회)와 信用組合(신용조합)
「福祉社會(복지사회) 建設(건설) 參與(참여) 해야」
物質(물질) 生活(생활) 無視(무시)로 唯物思潮(유물사조) 팽창·宗教(종교) 無關心(무관심) 招來(초래)
協同精神(협동정신)도 기르는 길
公議會(공의회) 精神(정신) 實踐(실천)의 嚆矢(효시) 歷代(역대) 敎宗(교종) 回勅(회칙)으로 敎示(교시)
지금으로부터 5年前에 메리놀 修女院의 가별修女님이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信用組合을 소개하여 第1番 組合인 聖家 信用組合을 釜山에서 발족시킨 以來 상당한 발전을 보여주고 있음은 우리나라 經濟生活을 協同的으로 발전시키는 原動力이 된다는 点에서 크게 意義 깊은 일이라 하겠다. 많은 信用組合이 뜻있는 이들의 指導밑에서 건전하게 育成되고 있으며 現在 百個以上의 組合中 거의 相當數가 우리 가톨릭敎會 안에서 組織·運營되고있는 것이다. 敎會 刊行紙에서 여러번 소개된 이組合은 最近에와서는 一般「매스·콤」을 통하여서까지 報道하게되어 民衆의 關心을 끌게 되었다. 따라서 이에 대한 贊反의 소리도 들리게 된다.
筆者는 여기서 信用組合의 本質인 『푼돈을 貯蓄하기를 源하는 사람들끼리 돈을 모아 臨時로 少額을 短時間에 融通하여 쓰는 協同組織體』(國際協同組合硏究院 信用組合 講師敎材)에 대해서나 基七個原則을 論하고자 함도 아니요, 그 運營方針을 말하고자 함도 아니다. 다만 個人主義가 한창 盛하고 서로 不信任하고 있는 우리 實情 속에서도 참된 團結心과 協同精神을 양성할 수 있으며 올바른 良心과 責任感을 길러낼 수 있다는 眞理를 前提로하여 只今은 우리가 物心 兩面의 貧困속에 허덕이고 있으나 앞날의 希望을 바라보며 國民으로서 福祉社會 建設을 위한 歷史的 義務感과 더우기 가톨릭 信者로서 人間의 尊嚴性을 깨닫고 社會經濟의 發展을 위하여 이바지할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한다는 良心的인 責任感에 대한 点을 그리스도의 말씀과 敎父들의 指示에 비추어 究論하고자 하는 것이다.
信用組合이라 하면 其他 社會團體와 마찬가지로 理想的일 뿐, 우리 現實社會에 맞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러한 組合이 非但 實踐에 옮겨져 結實을 얻을 수 있다할지라도 本堂神父나 敎友들의 使命이 아니라고 主張하는 信者들도 있다. 天主를 알아 恭敬하고 靈魂을 救하는 것이 敎會의 本然의 任務일진대, 衣食住에 대한 問題의 解決策을 追求한다는 것이 多神敎會의 脫線的 行爲란 主張인 것이다.
『너희 가난한 이는 진복자로다』「보화를 하늘에 쌓으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行動해야만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空中에 나는 새와 들에서 있는 百合花 模樣으로 天主님께서 먹고 입을 것을 주시니, 그런 物的인 걱정은 접어두고 樂觀主義로 生活을 營爲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解答은 聖經말씀을 본 뜻대로 窮究 理解해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대로 가난한 者는 어디서나 찾아 볼수 있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의 經濟는 零細 農家와 商工業者들 그리고 細窮民들의 生活 向上이 크게 問題視되고 있다.
家計의 後進性 營養失調 住宅問題 子女敎育 問題 等等 이 解決을 爲한 社會的 協同精神이 크게 要求되고 있는 것이다.
如斯한 實情에 想到할 제, 같은 社會안에서 살고있는 人間으로서 더구나 그리스도와의 神祕體의 媒體인 敎友로서 어찌 無觀心할 수 있겠는가? 只今은 주리고 목말라해도 나중에 배부를 것이며 百倍로 天主님께서 갚아 주신다는 말로 解決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問答이나 읽히고 靈魂 救靈事情에 對해서만 云云할때 天主님 大前에 모든 責任을 다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것만이 그리스께서 願하시는 信敦方針이란 말인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實踐 안 해도 無妨하다는 말인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새로운 계명의 實踐은 어떻게 이룩된다는 것인가? 이 問題에 대하여 聖經에서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으며 敎父들의 指示는 어떠한가? 성 요왕과 성 야고버 兩位 聖史께서는 愛德의 實踐에 대하여 嚴格한 말씀을 하셨다.
『불쌍한 者를 實際로 돕지 않는 信仰은 죽은 信仰이다』(야고버 2장) 『우리는 말과 혀로써만 이웃을 사랑하지 말고 행실과 眞理로써 物質的으로까지도 도와주어야 한다』(요왕 제1서 3장)고 하셨다.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天主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虛僞的 사랑인 것이다.(상기서 4장) 宗徒行傳 第4章의 말씀에 의하면 敎會 初代 敎友들은 이웃을 사랑하고 物質的으로까지 돕는데 「勸告」의 말씀까지도 實踐하였음을 볼수 있다.
『그 中에 궁핍한자가 아무도 없으니 대저 전답과 가산을 가진자들이 그것을 찾아 그 값을 갖다가 종도들 앞에 둠에 각 사람에게 요긴한 대로 나누어 줌이리라』 財産까지 찾아서 貧者에게 나누어주는 式의 愛德은 「勸告」를 實踐함에 該當되는 것이다.(종도행전 제5장 참조) 愛德의 誡命뿐 아니고 「勸告」의 말씀까지 實踐에 옮긴 初大 敎會의 團結心과 平和함은 可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財産을 다 팔기까지 아니해도 이웃을 어느程度 도울 수 있는 方法이 있으니 이는 요왕 宗徒께서 誡命임을 밝히셨다.
故 요안 23世께서는 「어머니와 교사」(MATER ET MAGISTRA)의 有名한 勅書를 通하여 人間 尊嚴性의 擁護와 社會問題에 對하여 光明을 던져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設定하신 敎會는 人類의 救援과 祉를 爲하여 指導하여왔다.
그리스도의 敎訓은 첫 째 人類를 天國으로 이끄는데 그 目的이 있는 것이지만 사람의 한 部分인 靈魂에 대한 指導에만 局限된 말씀은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을 全人類에게 傳하고 勸誘하는 任務를 가진 敎會는 靈魂의 聖化를 위하여 特別한 使命을 지고 있는 한便 肉身生命과 그 安定에 必要한 現實에 關해서도 關心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衣食住 問題의 解決策을 硏究하고 指導하는데 있어 但只 理想的인 理論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實踐에까지 도달시키는데 留念하고 있는 것이다.
故 요안 23世께서는 당신 勅書 序論에서 以上과 같은 緊急한 問題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말구 福音 8章의 『나 백성을 불쌍히 여기노니, 대저 저들이 이미 삼일 동안에 나와 함께 있으되 먹을 것이 없음이로다』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引用하시어 그리스도께서 말씀으로만 굶주린 무리를 가련히 여기셨을뿐 아니라 靈蹟으로 빵을 만들어 저들을 實際로 배불리셨다는 表樣대에 對해서 特히 附言 强調하셨다. 그리고 「地上의 平和」(PACEM IN TERIS)라는 社會問題에 對한 勅書에서도 다시 한번 人間尊嚴性의 擁護와 社會經濟問題解決에 對한 말과 理論을 넘어서야 하는 實踐에 對해서 强調하셨다. 社會 秩序를 바로 잡고 經濟條件을 向上시키는데는 相互協同的이어야 하는 까닭은 사람은 本質的으로 社會的動物인 緣故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敎皇聖下께서 社會問題에 對해서 訓示하실때 그것이 非但 信慾에 관한 道理는 아니라 할지라도 普通 사석에서 하시는 말씀과는 달라 敎政權을 通하여 말씀하신다는 것을 留念해야 할 것이다.
敎皇聖下께서 勅書를 通하여 하시는 訓示말씀을 輕視하여 읽어보지도 않는 聖職者나 敎友들에게 警告하기 위하여 著名하신 故 비오 12世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敎皇께서 勅書로써 당신 양들에게 말씀하실 때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들음이요』라고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이 適用됨을 確信하셨다.(勅書 人類의 衝突과 그릇됨, HUMANI GEUERIS 1950·8·12) 故 요안 23世께서는 우리에게 社會秩序를 바르게 하고 濟生活 向上에 이바지하는 協同的 實踐方法을 督勵하셨으니 이 말씀을 들어 順從하고 實踐할 때 우리는 우리의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살게되고, 비로소 그리스도의 兄弟姉妹가 될 수 있을 것이다.
人間의 尊嚴性과 自由를 公認하는 社會와 國家 더우기 가톨릭國家에 自然法을 無視하고 人類의 道德을 破壞시키는 致命的인 唯物思想이 浸透한 그 原因이 어디에 있는가? 現時点에서도 各處에서 그릇된 思想이 流行되려는 威脅을 겪고 있지 않은가?
自由·平等을 부르짖는 紳士숙녀들이 말과 혀로만 正義와 道理를 표방하고 無秩序한 社會와 貧困에 허덕이는 同族을 못본체하고 冬眠하는 동안에 平等과 地上의 樂園이란 美名을 표방하고 나선 所謂 共産革命家들이 社會에 뚫고 들어와 欺瞞的이긴하나 어떤 「비전」을 보여주고 이 미끼에 자칫하면 속아 넘어 갈수도 있다는 것이 率直한 現實일수도 있지 아니한가?
그동안 敎會에서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말과 혀로만 人間의 尊嚴性과 自由 平等을 云謂했지 오히려 墮落된 道義와 社會의 貧困에 對해서는 度外視하고 祭衣房에서만 우물거리고 있는 동안 사탄이 나가서 가라지의 씨를 뿌려놓은 社會가아닌가? 後者가 優勢한 것으로 보이고 人氣를 끌어온 것이 一理가 있는 것이니, 왜냐하면 前者가 梢極的인 理論에 滿足하고 있는 反面에 後者는 實踐的이요, 積極的이었으며 結果로 보아 魅力的인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實踐이 없는 理論은 自己를 속이는 것이기 때문에 無力한 것이다. 故 요안 23世의 말씀에 따라 敎會는 人間生活의 모든 分野 卽 救靈問題뿐아니라 經濟生活에 必要한 問題를 解決하는 現場에까지 進出해야 하는 것이다.
衣食住問題를 보람있게 解決하는 方法은 最近에 公議會에서 世界의 飢餓狀態에 對하여 論議된 대로 굶주린 者들에게 食品을 갖다주는 近視眼的인 方法으로써 依賴心만을 길러내는데 있지 아니하고 그들이 스스로 일하여 먹을 수 있는 自立的 精神을 길러내는 方法에 있는 것이다. 資源이 不足한 社會에서는 더우기나 相互協同精神이 必要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信用組合은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을 集團的으로 協助함으로써 우리의 社會生活을 圖謀하고 經濟生活을 向上시키자는데 그 目的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社會의 一員으로서 이 社會의 福祉와 繁榮을 이룩하는데 一縷의 責任이 있으며 더구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르는 信者는 그 責任의 重大함을 愛德之命의 角度에서 認識해야 할 것이다.
요왕 종도의 말씀대로 말과 혀로써만 이웃을 사랑할 것이 아니고 이웃과 더불어 많은 社會發展을 爲하여 무엇인가 實踐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自身을 속이는 者가 되어서야 道理가 되겠는가? 마테오 福音 25章 45節을 들어 이 글을 맺으려 한다. 『나 너희에게 진실히 이르노니 이 작은 자중 하나에게 아니 베풀때마다 곧나에게 아니 베푼셈이니라.』
卞甲善(神學博士·PISA大田敎區代表 忠南 唐津本堂 主任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