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平信神學(평신신학)의 인식·보급 필요 · 使徒職(사도직)의 모범 實話(실화) 선전코 / 金炳喆 神父(청주 내덕동교회)
최근 몇년동안 우리 한국가톨릭 출판사업도 비약적인 발전을 보았다. 진심으로 경하해야 할 일이다. 출판사업에 조예와 관심을 겸하고 이를 길러온 모든 인사들에게 그들의 노고에 대해 이 자리를 빌어감사드리고 깊은 한편 더 부탁드리고 싶은 것도 있다.
제2차 「바티깐」 공의회에서도 평신도사도직의 필요성을 모든 천주의 백성들에게 천명하였다.
여기에 사도직에 직접적으로 종사하는 성직자들이나 전도사들의 수가 부족하다는데도 이유가 있겠으나 평신도 사도직은 그보다 우선적으로 평신도의 본성에서 울어나오는 권리요 또한 의무라는데 더 근본적인 원인이 있으리라.
그러기에 평신도들이 그들의 본성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게하기 위해서는 평신도 신학의 보급이 필요하다.
평신도시학의 보급을 위해 이방면에 권위있는 신학자들의 사상을 담은 서적이 앞으로 나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평신도 사도직의 효과적인 전과를 위해 「가톨릭시보」와 가톨릭월간잡지에는 사회의 각 분야에서 평신도사도직을 이행하고 있는 모범적인 실화가 많이 실렸으면 한다. 이러한 평신도의 실화는 그와 똑같은 환경에 처해있는 다른 평신도들에게 자기도 평신도 사도직을 이행할 수 있겠다는 희망과 용기와 더불어 실용적인 지침까지 주겠기 때문이다.
또한 평신도 사도직은 각 가정에서 부모에 의해 그들의 자녀들에게 우선적으로 실시돼야 한다면 모범적인 신자가정의 자녀교육담 같은 것도 일반가정주부들에게 들려주었으면 좋으리라.
마지막으로 한국출판사업의 효과적인 육성을 위해 그리고 가톨릭 출판물의 좀더 광범위한 보급을 위해 성직자건 평신도건 좀 더 관심을 가져주고 협력해 주십사 말씀그리고 싶다.
■ 信者實生活(신자실생활) 요구에 呼應(호응)하고 專門性(전문성) 떠나 보다 大衆化(대중화) 돼야 / 徐桂淑(한양대 음대 전임강사)
「가톨릭시보」가 창간된 이래 우리에게 새소식을 전해주고 한국 가톨릭 교회의 발전에 기여한 바 다대함은 주지의 사실로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지면을 통하여 「가톨릭시보」를 위해 수고해 주시는 여러 선생님들께 심심한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신문이라면 먼저 일반적이고 보편적이고 대중적이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더우기 교회에 하나밖에 없는 「가톨릭시보」는 우리 한국 전교우에게 교회를 전달해 주고 또 그들의 메마른 생활에 교회의 따뜻한 손길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하는 임무를 띄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독자인 교우들의 상태와 또 그들이 요구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아내어 거기에 맞게 또 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기사를 취급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기사 전부가 그러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가끔 『이런 기사를 얼마나한 교우가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한 정도의 전문적인 지식을 요하는 기사가 가끔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기사가 그러한 일부층에만 속하는 특수성을 벗어나서 더많은 교우에게 보람을 줄 수 있는 방향으로 다루어 졌으면…하는 욕심이 있다.
거친 사회의 소용돌이 속에서 삶에 허덕이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또한 교회를 벗어나는 냉담자들이 속출하고 있는 것이 비단 한국뿐 아니라 세계적인 교회의 문제가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고 보면 더욱더 「가톨릭시보」가 일반신자와 가까울 수 있고 우리 신자들의 요람이 될 수 있는 신문이길 바랄 뿐이다.
■ 文藝面 개척으로 흥미 돋궈 · 강연 등 文化行事 적극 主管 / 노 바오로(仁川 沓洞本堂)
원래 신문이란 우리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며 그만큼 신문을 만들기란 무척 힘든 줄을 누구나 대강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왠지 모르게 「가톨릭시보」에는 무언가 불만스러운 느낌이 있다. 우선 첫 인상이 너무 딱딱한 것 같다. 물론 교회기관지라는 제약도 있고 선입감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딘지 답답증을 느끼게 함은 왠일일까? 제2차 「바티깐」 공의회에서는 하느님의 백성인 평신도의 역할에 대하여 강조되고 있는데 「가톨릭시보」도 좀더 평신도화 시켰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부드럽게 만들어지면 우선 읽고싶은 의욕을 일으킬 것 같다.
음식은 먹음직스러워야 하고 영화나 소설은 우선 재미가 있어야 하고 신문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읽을 흥미를 일으켜야 하지 않을가 한다. 현실적으로 평신도의 수준이 앝고 능력이 미급하다고는 하지만 그러한 현실을 타개해 나가는 것이 또한 신문의 사명이 아닌가 한다. 단순한 보도의 임무에 끄칠 것이 아니라 교화와 계몽의 사명에 힘써야 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일반 평신도의원고를 더 많이 싣도록 해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문예면의 개척을 바란다. 원래 우리나라는 가톨릭 문예면에서는 다른 나라보다 뒤떨어지는 것 같은데 문예를 통한 하느님께 대한 찬미가 좀더 활발해 졌으면 싶다. 그리고 또 한가지 바라고 싶은 것이 있다면 교회 재일치운동에 있어 좀 더 시보사가 앞장을 서서 움직이고 그 방면의 실제적 활동의 소식을 전해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시보사가 주최하는 각종 행사 예컨대 특별교리강좌라든가 강연회라든가 「심포지움」 음악회 등이 있었으면 좋겠으며 특히 지방에서의 모임이 더욱 절실히 요구된다. 그리고 현재 신자들 중에는 가톨릭 용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고 그 방면의 해설책도 없으므로 「시보」에서 보다 이 방면에 주력해 주기 바란다.
■ 敎會內(교회내) 筆陣(필진)의 빈곤 타개는 稿料(고료), 一般(일반)수준과 같아야 / 안철구(文筆家)
우리나라의 가톨릭은 들어온 경로에서부터 다른나라와 조건을 달리하고 있으며 그 역사는 세게가톨릭에 자랑할만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우의 수도 1966년도 통계를 보면 70만7천을 헤아리고 있으니 총인구의 비율로 보아도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에서 운영하고 있는 출판사업이 다른 기관에서 운영하는 출판사업에 비해 언제나 뒤떨어지고 있다는 현실을 볼 때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다시 한번 살펴 볼만한 일이다.
나 자신이 글을 써서 생활을 꾸려가는 사람이기 때문에 다른 부문에서 일하고 있는 분들보다 좀 더 현실적인 면에서 그 원인을 풀이하게 된다는 것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첫째 가톨릭출판물에서는 당사자들이 흔히 『필자를 구하기가 힘들다』는 말을 한다. 그들이 말하는 필자란 물론 『믿을 수 있는 필자』를 말하는 것이다. 필자를 구하기 힘든다는 것은 그만치 좋은 글을 얻을 수 없다는 이야기이므로 출판물보급에 지장을 주는 중대한 요인이 되는 것이다.
나는 『필자를 구하기 힘든』 원인이 비현실적인 원고료에 있다고 지적하고 싶다. 대체로 가톨릭기관에서 지출하고 있는 원고료는 일반 시중의 고료보다 절반 또는 그 이하의 선에 머물러 있다는데 대해서 이의를 내세우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우리처럼 글을 써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우선 다급한 식생활을 개척하기 위해서라도 고료가 많은 『일반 원고 우선』의 방향을 돌리기는 매우 힘들 것이다. 그러니까 자연히 교회출판물의 원고 청탁이 뒤로 미루어지고, 또 거기에서 각가지 애로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면 출판 사업을 하는 당사자들은 거의가 입을 모아 『가톨릭 출판사업을 일반 영리 사업과 비교해서 말할 수야 없지 않은가』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식의 토론 과제일 뿐 문제의 해결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영신생활의 양식 보다는 육신생활의 해결 문제가 더 다급한 입장에 있는 당사자에게는 아무런 자극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원고료를 일반고료 수준에 올려놓은 다음에야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