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年(년)에 韓國敎會(한국교회)가 해야할 時急(시급)한 일 (2)
信仰主體性(신앙주체성) 확립
司牧(사목) · 信者敎育(신작육) 再檢討(재검토) 해야
無感覺(무감각) · 無關心(무관심) 속에 混迷(혼미) 거듭하고 公議會(공의회) 영향 殆無(태무)
발행일1967-02-12 [제555호, 1면]
1967년이라고 局限시킬 것 없이 現時点에 있어 韓國敎會의 時急한 問題는 무엇인가?고 생각해 보고 싶다. 여러가지 具體的 問題를 여기서 論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結局 論点은 우리 敎會가 오늘의 韓國社會 안에서 그리스도의 延長이 될 수 있기 爲해서는 우리는 무엇을, 혹은 무엇부터 먼저해야 할 것인가에 歸着된다고 본다. 그것은 또한 참된 그리스도敎 信仰問題이기도 하다.
그럼 韓國敎會는 이 社會 안에서 참되이 그리스도의 延長되기 爲해서는 무엇부터 먼저 해야할 것인가? 나는 「信仰의 反省」이라고 말하고 싶다.
個個人의 信者로부터 시작하여 司牧者들에 이르기까지 全體敎會 앞에 이같은 反省의 「무드」가 깊이 造成돼야 한다고 본다. 누구를 비판하는 것도, 他를 非難하는 것도 아닌 自我反省이 信者個個人과, 또한 누구보다 먼저 모든 聖職者, 修道者, 最高司牧者들 안에 일어나야 한다.
實은 이런 意味의 警鍾이 韓國敎會 안에도 울리지 않았던 바는 아니다. 至今도 여러가지 모양으로 울려퍼지고 있다. 그러나 「누구를 爲해서 鍾이 울리는지」 모를만큼 如前히 無感覺 · 無關心하다는 것이 우리의 實情인 것 같다.
「自由의 鍾」기 울렸다고 自由가 얻어지진 않는다. 누구인가가 말한 것 처럼 自由란 爭取하는 것일 것이다.
그와같이 우리는 信仰生活에 反省하고 敎會는 刷新되어야 한다고 아무리 높이 소리 질러댔자 그것만으로 우리 個個人과 全體敎會가 反省刷新 될 수는 없다.
公議會以來 이 刷新을 부르짖는 소리는 韓國敎會에 까지도 波狀쳐 온 것이 事實이고, 主日강론, 主敎들의 司牧敎書, 적으나마 敎會 出版物 等을 通해서 坊坊谷谷에까지 이 소리가 퍼져갔을 것이다. 그런데도 反省의 「무드」는 좀처럼 造成되어 가는 것 같지 않다.
變化가 있었다면 皮相的이나마 典禮部面에 있어 若干의 진전을 볼 수 있을 뿐이고 보다 더 本質的 信仰生活面에 있어서는 根本的으로 公議會前이나 大差없다. 무엇이 原因인가? 公議會가 있은 「로마」와 韓國사이의 먼 거리 때문인가? 우리 敎會의 歷史가 아직 얕은 탓인가? 韓國社會 自體와 같이, 이 땅의 敎會 亦是 아직도 前近代性을 벗지 못한 탓인가? 이 모두가 다 그 하나의 理由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보다 더 根本的인 다른 理由를 찾고자 한다.
우리에게 더 本質的인 것이 不足, 乃至缺乏된데서 그같은 無感覺, 無關心 속에 韓國敎會가 빠져있다고 본다.
그것은 그리스도敎的 精神, 참여된 그리스도敎 信仰에 立脚한 靈性의 缺乏이다.
靈性 - SPIRITUALITAS - 이것이 우리에게 너무나 不足하다. 아니, 차라리 이것의 不足 조차도 느끼지 못할 만큼 이것에 缺乏되어 있다.
오늘날 西歐에서는 그리스도敎的 西歐社會의 非그리스도敎化가 甚히 유감스럽게 指摘되고 있다. 그러나 그곳의 信仰冷淡은 質的으로 다른 것 같다.
왜냐하면 前者의 冷淡은 가졌던 것을 잃어가는 狀態를 두고 말하는 것이겠지만, 우리의 冷淡은 皮相的으로 信仰者와 같이 보였을 뿐이고 實은 本來의 未信狀態로 原狀復歸되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日前에 어떤 外國人 神父님으로부터 韓國사람들의 「믿는다」는 것과 西歐 사람들의 「믿는다」는 것엔 質的인 差異가 있다는 말을 듣고 많이 생각되는 바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 信者들에 있어선 大部分이 「믿는다」는 것은 「성당에 다닌다」 「신공을 드린다」 「守戒를 한다」는 것과 同義語이고, 그것은 使徒信經을 비롯한 敎理內容 乃至 그리스도敎 精神과 何等의 깊은 連關없이도 곧잘 表示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問題되는 것은 오늘날 70만의 信徒 數를 과시하는 韓國敎會이긴 하지만 果然 이 70만의 몇 割 程度가 그리스도敎 信仰이 무엇인지 理解하고 있는가일 것이다. 勿論 그들에게 察考라는 그 敎理試驗을 친다면 相當數가 根本敎理에 있어서 及第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知識에 不過한 것이고 그것이 果然 生活化한 信仰인지는 크게 疑問視 된다.
한 마디로 韓國敎會의 오늘날의 根本問題는 그리스도敎 精神 乃至 信仰問題이다. 急作스럽게 肥大해진 그 外觀과는 달리 그리스도敎 信仰이 참되이 뿌리 막지는 못한데서 反省할 줄도 모르고 그 必要性도 切感하지 않는 狀態이다.
聖堂 學校 病院이 많이 들어서고 수도회가 팽창하고, 가톨릭 「악숀」이 점차 活潑해져 가는 韓國敎會 같이도 보이지만 이 모든 發展이 「붐」化된 都市計劃 工業團地造成 等 政府의 現代化作業과 大差없는 것이라면 過言일까?
오늘날 韓國의 政治엔 哲學도 「비젼」도 없다는 말을 흔히 듣게된다. 우리의 司牧, 우리의 慈善 · 敎育 社會事業 病院 運營 우리의 學生운동 其他 가톨릭 「악숀」에는 과연 神學에 뒷받침된 靈性과 「비젼」이 있는지 묻고싶다.
우리는 反省해야 한다. 우리의 生活, 우리의 活動, 우리의 司牧과 傳敎까지도 참으로 그리스도敎 信仰과 精神에 入閣해 있고, 여기서 우러나는 것인지 反省해 보아야 한다.
이같은 反省을 爲해 구체적으로 時急히 해야할 일을 提示한다면 그것은 信仰에 대한 信仰 속에서 이룩돼야 하는 信者들의 再敎育이다. 따라서 이것은 同時에 司牧上의 時急하고도 莫重한 問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