本報(본보) 紙領(지령) 第(제)500號(호)
不忘(불망)의 三十八(삼십팔) 星霜(성상)
27年(년) 4月(월) 1日(일) 創刊(창간)
南方靑年會(남방청년회)가 4·6倍版(배판)으로 月刊(월간) 社是(사시)·「報道(보도)·意見交換(의견교환)·步調一致(보조일치)」로
창간 6年(년)만에 發刊(발간)도 첫 發刊部數(발간부수) 2千(천)6百餘(백여)
▲天主敎會報 時代
교리연구만을 목적으로 모였던 「명도회(明道會)를 발전적 해체하고 적극적인 가톨릭청년운동을 표방하여 1924년 7월 20일에 창립한 「조선남방 천주공교 청년회(朝鮮南方天主公敎靑年會)」는 부녀자의 계몽을 위해 시작한 「해성여자 야학강습소」(後에 海星女子學院)으로 발전)와 함께 그 가장 빛난 업적의 하나인 「천주교회보(天主敎會報)」를 1927년 4월 1일자로 발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1, 소식보도 2, 의견교환 3, 보조일치(步調一致)를 「슬로간」으로 창간된 이 월간(月刊) 신문의 첫호는 4·6배판으로 8면을 내게 되었는데 발행인은 당시의 주교좌본당 주임이며 교구 부주교였던 죠셉·베르모렐(張若슬) 신부이며 편집은 청년회 간부들이 맡게되었는데 최정복(崔正福) 윤창두(尹昌斗) 이효상(李孝祥) 서정섭(徐廷燮) 최재복(崔再福) 등 제씨였으며 그후 6년간 발간이 계속되는 동안 이인복(李仁福) 김주석(金周錫)씨 등 세분이 편집위원으로 추가 되었다.
처음 「조양회관」(朝陽會館=현재 源花女中高敎) 인쇄부에서 인쇄하게 되었으나 제4호부터는 「대구인쇄 합자회사」(日人경영=현대의 아세아극장 자리에 있었음)로 옮겼는데 당시 대구에서는 가장 큰 인쇄공장이기 때문이었다. 제2호부터 4·6배판 4면씩을 발행하다가 제10호부터 제12호까지 3회는 매호 6면씩으로 지면이 증면(增面)되었고 창간 1주년인 1928년 4월 1일자 제13호부터 「바불로이드」판으로 지면을 확장됨과 동시에 필노리안·더망쥬(安世華) 주교님의 『모든 교우들은 이 천주교회보를 항심으로 보고 또 힘대로 도와주라』는 고무적인 교서로 청년회 간부들은 용기와 힘을 얻게 되었다.(이 교서가 발표되기 전에는 성직자와 신자들 중에서는 「천주교회보」라는 명칭이 너무 거창하고 당돌하다는 등 일부의 비평도 있었다.)
내용의 충실과 함께 지면의 쇄신을 위해 인쇄공장을 다시 옮겼는데 제18호(1928년 9월 1일자호)부터 서울에 있는 「근택인쇄부」(近澤=현대 京鄕신문사)에서 인쇄를 하게 되었다.
1931년 7월 7일 더망쥬·안주교께서 「회보」를 난방교구(경상·전라남북)의 기관지(機關紙)로 정하시고 『모든 성직자들에게 이 사업을 발전시키도록 힘쓰라』는 공시(公示)를 발표하심과 아울러 회보사(會報社)의 사장으로 당시 주교좌본당 주임 뻬셀(白鶴老) 신부를, 부사장에 청년회지도 발라바·장(張順道) 신부를 임명함으로써 「천주교회보사」를 정식으로 발족시켰을뿐만아니라 교구의 명예부주교였던 죠셉·베르모렐(張) 신부를 위원장으로하는 「회보후원회」를 조직케하였다.
지방인 대구의 청년회에서 발생한 「천주교회보」가 전국적으로 신자들사이에 호평을 받고 읽혀지는 사실을 본 서울의 신자들은 1927년 7월 10일자로 「별」이라는 월간(月刊)신문을 당시에 「경성교구 천주교호 연합청년회」의 이름으로 발간하여 「회보」와 선의의 경쟁을 하게되었는데 체제에 있어서나 내용에 있어서 「회보」가 우수하였고, 당시, 발행부수는 2천부였지만 멀리 「하와이」에 있는 교포들에게까지 회보가 읽혀졌다.
경제적 난관도 차츰 극복되어 힘차게 자라나던 「천주교회보」는 『가톨릭운동의 힘을 분산(分散)하지말고 한곳으로 모아야 한다』는 주교님들의 뜻에 순종하여 1933년 4월 1일 창간 6주년 기념호인 제73호를 마지막으로 내고 눈물을 머금고 폐간(廢刊)하였는데 이에 앞서 3월 18일자로 당시의 5위 주교님들의 공동교서(共同敎書)는 『모든 출판물은 서울에서만 발행토록하며 「회보」와 「별」보를 폐간하는 대신 청년들을 위한 새로운 잡지를 발간한다』는 주교회의의 결정을 반포하였던 것이다.
▲8·15後 復刊初
1948년 9월에 결성된 「대구교구(慶常南北道) 가톨릭청년회 연합회」는 대구 본방인 첫주교 고(故)요안·최(崔德弘) 주교의 축성식 다음날인 1월 31일 선임(先任) 교구장 노(盧基南)주교와 신임교구장이며 총재인 최주교의 임석아래 개최된 임시총회에서 연합청년회의 사업의 하나로서 16년전에 폐간된 「천주교회보」를 복간(復刊)할 것을 결정하여 1949년 4월 1일자 제74호로서 속간(續刊)되었는데 중간 첫호에 내세운 취지의(슬로간」은 1, 보조(步調)일치 2, 의견교환 3, 조국성화였다.
제74호 제76호의 3개월 동안의 인쇄는 「영남일보」 공무국에 의뢰하게 되었는데 당시의 인쇄시설사정은 일간(日刊) 신문사의 휴일(休日)을 이용해서 하루 동안에 모든 인쇄작업을 끝내야했기 때문에 손부족한 「회보」 실무자의 고충은 대단하였다.
-인쇄공들에 대한 휴일 특근수당과 접대문제, 교정(校正)을 빨리 봐주어야 하는 문제, 조판의 입회(立會)와 부족한 기사(記事)와 원고의 긴급보충 문제 등등 혼자손으로는 도저히 정신차릴 수 없이 바쁜 시간의 연속이었다.
제74호와 75호의 편집은 옛날 「천주교회보」의 편집대표였으며 새로 중간된 「회보」의 발행인인 요셉·최정복(崔正福) 선생이 손수 모형지(模型紙)에 자를 대고 선을 그어 설계도처럼 상세하게 편집을 하였고, 76호부터는 필자가 편집에 대한 모든 일과 발송과 업무(業務)에 이르기까지의 실무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당시 필자는 「경향신문」에 종사한 경험이 있을뿐아니라 청년회의 사무장격인 서기의 직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국의 광복 후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보장되어있지만 정기간행물(定期刊行)로서의 발행 허가 수속은 해야하겠으므로 당시 「영남일보」편집국장 조씨에게 허가에 관계되는 것을 알아봤던바 그는 『교회에서 발행하는 것은 일반사회에 배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허가가 필요 없다』는 법해석이었다. 그 말만 믿었던 청년회 간부들은 3회나 정기간행물 발행허가도 없이 간행을 했는데, 인쇄된 「회보」를 경상북도 공보과에 납본(納本)하였더니 불법적인 간행물이므로 접수할 수 없으니 빨리 허가수속을 하라는 것이었다.
서둘러 허가신청 서류를 만들어 서울가는 요안·오(오룡진) 선생편에 부탁하였더니 서식(書式)이 틀렸으며 미비한 서류가 많다고 되돌려져 왔으므로 다시 서류를 갖추어서 스테파노·신(申相祚) 신부님 서울가는 편에 부탁하여 당시 법제처에서 일보시던 미가엘·주(朱秉煥) 선생을 앞장세워 중앙청 공보처에 접수시켜 즉석에서 구두(口頭) 허가가 되고 1949년 8월 8일자 허가번 제158호의 정식 허가장(許可狀)을 경상북도지사를 통하여 받게 된 것이다.
「회보」 발행을 위해 청년회가 마련했던 자금은 12만원(圓=지금 화폐의 천분의 1)이었는데 허가도 없이 세차례 발간한 조판 및 인쇄비와 용지대금과 잡비 및 발송비 등으로 다 지출되었고 회보대금은 한푼도 입금되지 않았을뿐 아니라 수금(收金)할 수도 없었으며 약간의 찬조광고(廣告) 대금이 들어온것 뿐으로 정식허가는 받았지만 자금은 1회분의 발간비용도 못되어 재정적 고통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다음호에 계속)
■ 沿革(연혁) 槪要(개요)
▲1927년 4월 「天主敎會報」(月刊)로 創刊
▲1931년 7월 남방교구 機關紙로 確定
▲1933년 4월 제73호로서 發刊
▲1949년 4월 復刊(제74호)
▲1949년 8월 8일 定期刊行物(月刊) 許可
▲1949년 11월 4일 제三종 우편물 認可
▲1951년 5월 靑年會에서 敎區로 經營移讓. 天主敎會報社 설립. 社長 崔민순(요왕) 神父 主筆 李孝祥 編輯長 尹光宣
▲1951년 5월 12일 旬刊(月2回)으로 增刊許可
▲1953년 3월 「가톨릭新報」로 名稱변경
▲1954년 1월 「가톨릭時報」로 다시 改稱
▲1956년 6월 崔민순 社長辭任
▲1956년 10월 直營印刷局發足 林和吉(안드레아) 神父 社長任命
▲1959년 6월 20일 루디·서기호 神父 社長任命
▲1959년 9월 1일 루디 神父 社長就任
▲1959년 10월 11일 (제204호) 다블로이드 販에서 新聞販으로 紙面擴大
▲1960년 1월 3일 (제210호) 週刊으로 增刊
▲1961년 8월 蔣柄補(베드루) 神父 社長任命
▲10월 1일 社長就任 11월 社屋移轉(南一洞)
▲1962년 1월 1일 申相祚(스테파노) 神父 社長就任
▲1962년 4월 30일 申相祚 社長 尹光宣 主幹 辭任 直營印刷局 大建校로 移讓
▲1962년 5월 發行人 金永浩 神父로 變更과 同時에 社長就任
▲1962년 7월 申鉉玉 신부 社長就任
▲1964년 6월 金壽煥 신부 社長就任
尹光宣(本社 前主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