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의 기쁨을! 겸사로 「가톨릭시보」 지령(紙齡) 제500호 기념을 당하여 강호 독자계언의 절대적 성원리에 오늘의 대 발전을 보게된데 만강의 축하를 보낸다.
편집자는 무슨 회고담을 하라는 요청인데, 이것도 회고담이 될지.
시보를 주간신문으로 내기로 결정을 보자 그때 자유당정부의 일간에 준한 주간지 간행허가를 받는 난관이 닥쳐왔었다. 루디 신부(週間發足時의 房長)와 나는 유주간(尹光宣씨)이 단정히 꾸며준 허가원을 그 당시 공보실출판과에 불쑥 내밀었으니 그게 밀려 들어갈리 만무했다.
우선 접수만 해달라고 떠맡기다시피 해놓고, 요셉 이서구 선생을 찾아 고위층의 납득을 구해봤다.
언론, 출판, 자유의 원칙만 내세우는 루디 신부에게 설명해 주는 일만도 나로선 진땀 뺀 일이었다.
무료히 지내던 중 예수회 신부관을 찾아 환담중 기발한 착상을 얻었다. 그것은 별것도 아니다. 전성천 실장을 대면하여 그분의 목사님으로서의 동정을 구하는 것이었는데 용케 면접의 「찬스」는 얻었지만 그의 첫말은 『여보시오 장면이란 분은 진리를 왜곡하고 있지 않소?』하는 것이었다. 실은 이것이 그의 입으로 나와 주십사 했었던 바로 그 과녁이다. 나는 기발한 착상의 각본을 읽기만하면 됐던 것이다. 『…』
『그럼 뭣으로 보증하오?』 나는 미리 마련한 장문의 진정서겸 각서를 전했다. 그는 어느 대목에 가서 갑자기 희색이 만면해 지면서 자리를 차고 일어서면서 최선을 약속한다고 했다.
그는 영어로 끝말을 맺기에 뒤에 그의 말뜻을 비서에게 새겨달랬더니 그는 서슴치 않고 거의 완전히 통과된 거라고 알려주는 것이었다. 참 어처구니없는 기발한 착상, 그래도 나대론 「포켓」 속으로 묵주알을 굴리며 그 어마 어마한 권력의 문턱을 나왔었다.
이건 일장의 얘기거리로도 싱겁기만할뿐, 나의 회고의 첫 머리에 둘바도 아니지만 권좌(權座)를 보는 나의 눈은 아직도 별로 흐려지진 않은 듯 그 서슬이 퍼렇던 그때 그 광경이 눈시울에 떠오른다. 이제 장하게 자란 가톨릭시보! 무엇보다 그 안에 담긴 성좌(聖座)의 소식과 말씀들이 대견한 생각에 좀더 어떻게 더 많이 퍼졌으면 할뿐이다. 그 방법은 우리가 나서서 할일이다. 적어도 제 둘레에 이런 진리를 전하는 신문이 있음을 권해야 하겠다.
나는 곧잘 이런 뚱딴지같은 말을 한다. 마리린·몬로가 자살한 것은 어떻게 좀더 곱게 뵐려고, 좀더 「펜」들의 인기를 얻으려고, 아마 미용수술 등 할 짓은 다 했을 것이다. 그 위에도 좀더 좀더 하다가 죽은게 아니냐고? 그같이 허무히 죽은 그를 비겨 오늘 신문을 낸다는 사람들에게 경박한 상업수단을 견제해 달라고 간청하고 싶다.
번연히 자살로나 끝장낸 길밖에 없는 그 무책임한 기사와 치장을 그치지 않는 것이 제8계의 망녕된 증참을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천주십계는 바로 천주님의 실성법인 줄 자각한다면 적어도 신문에(일반신문) 종사하는 사람으로선 반성해볼 일이 아닐까? 「마리린·몬로」 주의(主義)로 신문을 제작한다는 나의 익살이 못마땅할 진댄 천주의 법을 염두에 둘 일이다. 지옥의 공포(恐怖)가 아니라 천국의 희망을 주는 신문제작태도 말이다.
천주님의 법이라지만 어디서 배울 수 있느냐?고 할 것이다. 마침 최선의 얄팍한 책자가 있다. 요안 23세의 사회회칙(社會回勅) 「빠쳄·인·떼리스」(地上의 平和)이다. 이의 시작은 천주님의 법을 준행함으로써만 평화가 올 수 있다고 했고 또 그렇게 맺은 것이다. 국제정치(國際政治)와 국제법(國際法)의 원천이 다 여기있어 그 진로(進路)를 명시(明示)해 주지만, 나는 특히 신문에 종사하는 가톨릭인들은 이를 비공식의 사시(社是)로 삼을 것을 권한다. 허지만 이또한 그렇게 읽기 쉽고 잘 새겨지는 것이 아니다. 별반설명이 없이된 글이기 때문일 것이다. 헌데 그 해결책을 가톨릭시보에서 구할 수 있다. 시보의 기사 논설을 잘 읽어보면 아주 기술적으로 그것을 잘 전해주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것이 우리의 시간과 수고를 덜어주는 해결책이 아니겠는가? 가실 공과한권만으로도 자기성화(聖化)의 길은 충분한 것이다.
허지만 자기만 성화되고 그것으로 끝난다는 것을 계산할 줄 알아야한다. 여기 영리한 저울질도 할 줄 알아야 한다. 바라건대 연중 끊임없이 성탄의 기쁨을 안겨다주는, 보다 대하기 즐거운 신문으로 발전할 것을 빌며 장항한 축사가 된 것이 죄스럽다.
姜達秀(前本社 編輯局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