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령 5백호를 맞아 그간 폐지 보급에 다년간 물적 희생 및 직접 봉사를 아끼지 않았던 분들의 공노를 치하하는 뜻에서 「숨은 공로자」 찾기 운동을 폈던바 많은 호응이 있었다. 여기에 발표하는 분외에도 다달이 거액을 부담, 수십부씩을 전교지로 혹은 일선장병에게 보내신 분들, 특히 채택되었으나 이를 굳이 사양하신 몇분에겐 그뜻을 마음속으로 더욱 감사드리며 끝으로 이일에 협조해주신 본당신부께 감사드리는 바이다. 한편 「가톨릭시보」 장기구독 보관자모집중 제3항 해당자들이 몇명 있었다. 창간이래 정간, 혹은 복간후에도 당시 여러가지 애로로 정기발간일이 지연되는 등 불규칙한 발행으로 사실 전지보관자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제1항(창간호 이래의 전보관자) 해당자 한분을 모집공고 불과 일주일 앞서 놓친 애석한 사실도 있다.
■ 보급 공로자들
- 공소에까지 배달하고 / 論山 박희양씨
▲박희양(리노·26세 농업·충남 논산읍 반월동·손만재 신부 추천)
발리노씨는 단정하고 겸손된 인품에 JOC, 청년회 등 어디서나 성실하다. 부유하지 못한 농가의 연소한 가장으로도 그는 매주일 오전 6시 첫미사부터 11시 미사까지 참석하여 구독자에게 「시보」를 일일이 배부하며 공소에까지 배달하고 있다. 정해진 구독부수외 20부의 여분을 주문해 놓고 그 경비는 자비로 전교활동 등에 사용하고 있는데 「시보」 보급에 나선지 4년이나 되었다.
그간의 소감을 묻는데 『교회의 가장 중요한 복음을 전달하고 교회출판물 운동에 간접적으로나마 힘이 되길 바랄뿐』이라고만 대답한다.
- 본당발전 「시보」 보급에 걸고 / 釜山 池吉鉉씨
▲지길현(吉鉉·요셉 군공무원, 부산 동업구 수영동 37·광안동본당·장발다살 신부 추천)
지요셉씨는 1959년에 신설된 레지오단원이면서 「시보」 보급에 나섰는데 본당을 부흥시키는 길이 바로 「시보」 보급이라고 생각하고 처음 15부로 출발 50여부까지 확장하고 있다.
수금되지 않는 「시보」 대금을 대신 선불해가면서 첫미사부터 마지막미사까지 치켜보고 서서 일일이 「시보」를 나누어 주고 있다.
요셉씨는 인제는 「시보」 구독수가 증가한다고 못내 기뻐했다.
- 적자 아랑곳없이 5년을 한결같이 / 安東 金榮在씨
▲김영재(바오로 51세·상업·안동시 대석동 안동본당·차크리스티아노 신부 추천)
그게 무슨 공이랄게 있느냐고 김회장은 손을 내 저으면서 「시보」가 우선 지령 5백호를 내어 그것만이 기쁘다고 했다. 김바오로씨는 본당회장, 레지오단장 등 본당의 중책을 도맡고 있어 처음 「시보」 보급을 맡은 동기도 전교와 교우들의 교회지식배양에 뜻한 것이라 한다. 60년경 처음 1백부로부터 시작, 당장 160부로 올랐으나 수금경과는 본전과는 동떨어진 차액이다. 할 수 없이 자비로 충당해 놓고 교우들에겐 지대에 대한 말도 않고 구지 자꾸 더 보라고만 권했다. 결과 2년후엔 결손처분을 한 것이 부지기수지만 체납자에겐 도무지 내색도 없다. 그런데 5년후인 지금 적자가 얼마났느냐니까 『아마 적자는 나지 않았을 걸…』하니 그는 도무지 수지계산은 아예하지도 않고 있는지 알고도 덮어놓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현재 80부 중에서 암만해도 10주가 그냥남아 돌아가는데 그는 본사에 줄여달라고 연락할 생각을 않는다.
5년간의 그의 이런 적자운영갑수의 희생이 없었다면 안동본당 현재시보 부수는 몇부, 몇10부 그 명맥이나 유지했을지 의문이다.
- 불타는 전교열을 「시보」에 담아 나눠 / 群山 朴重基씨
▲박중기(요셉·47세, 조선利器회사 사장, 군산시 영화동, 군산월맹동본당, 김이환 신부 처천)
박씨는 3년전에 영세했는데 사회적인 신망은 물론, 신자들에겐 훌륭한 신앙의 표본이기도 하다.
그의 전교열은 대단하여 사회의 저명인사와 빈번히 접촉하고 종교에 대한 대화와 토론을 하며 성서와 가톨릭시보 등 교회 출판물을 자비부담으로 남몰래 선사해 왔다. 그는 매일미사에 빠짐없이 참석하여 미사해설을 맡고 큰 첨례때마다 성가대 청년회원들을 불러다가 다과회를 열고 격려하는 등 평신자로서 부제직과 보좌신부 역할을 대신한다는 칭찬이 자자하다.
■ 본지 보관자들
- 놓쳐버린 「창간호」부터의 보관자 / 大邱 李三祚씨
「가톨릭시보」 창간호부터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일찍부터 듣고 있는 때 응모 마감기일 하루전에도 문제의 이삼조(미카엘)씨가 나타나질 않는다. 하는 수 없이 「카메라」를 울러메고 대구 신암동 골짜기에 있는 그의 집을 간신히 물어서 찾아갔다. 『허허, 내 그럴줄 알았심더. 허나 만사 허탕입니다』 말쑥하게 도배된 방으로 안내하며 그가 한말이다. 모집공고 일주일전, 그간 30여년을 전란과 또 넉넉잖은 살림살이로 거듭하는 이사때마다 이 신문덩어리의 보관과 운반이 큰 두통거리었는데 어떤 『운명의 장난』(그의 말)으로 하루아침 문득 그중에서 한뭉치를 끌어내다 도배를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삼조씨는 「시보」 창간 당시의 배달원이다. 그때부터 5부씩을 모았는데 수년전 4벌은 어떤 신부님께 기증하고 한벌만을 여태 보관했다가 그 참변아닌 참변을 당한 것. 기자가 다녀온 이튿날 아침 이씨는 창간호 부록에서 12호까지와 「다블로이드」판 한뭉치를, 본사에서 필요할지는 미쳐 몰랐다면서 시보사에 기증한다고 갖다놓고 갔다.
- 되 펼쳐 볼 때마다 대견스럽기만 해 / 서울 金仁淑씨
▲김인숙(글라라·28세, 제3항(204~500호까지) 서울특별시 성북구 길음동 534의 6, 미아동성당, 주부)
다음은 김씨의 보관 소감기다.
『몇년동안 다락 속에서 잠자고 있었던 누렇게 바랜 뭉치까지 꺼내 보았읍니다. 첫 「페이지」가 마침 204호 한장 한장 차례로 넘겨보니 그이와 내가 따루 따루 사서 두장씩 겹으로 있는 것이 몇부 있는데다가 꼬박 차례를 따라 지난주의 497호에 이르기까지 어김이 없읍니다.
그동안 한낱 신문지 쪽이 아닌 소중한 어떤 성물을 다루듯 하는 그이의 마음을 따라 내용을 모르는 동생들 까지도 협력해준 덕분이라고 지면을 스치는 손길에 마냥 대견스러움을 감추지 못합니다. 용기를 얻어 직장에서 돌아오신 남편을 졸라 응모해 보기로 했읍니다.
비록 바랬어도 아직 또렷 또렷한 활자로 그 본래의 사명을 우리 신자들에게 전달해 주는 이 시보는 우리 한국가톨릭의 거울이었읍니다. 주일마다 대하는 새소식, 전세계 가톨릭교회의 발전상을 일목요연하게 펼쳐보여주는 기사를 쫓아 멀리 「바티깐」에 이르기까지 시야를 뻗혀 보기도하고 성인 성녀의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기구를 빌기도 했읍니다.
「디알로그」「반사경」란을 읽고 자기반성에 겹쳐 끝없는 공감을 보낸적이 있었읍니다. 돌이켜 볼때 장기구독 신청을 내지 못한 주변 탓으로 주일마다 판매소를 찾아야 하며 그러는 중에 두장씩 겹으로 사는때도 있고 그이가 사 오시겠지 하다가 어긋나면 다음주일을 기다려 한꺼번에 구입하는 등의 이런 따위 어리석음은 이젠 고만 새해부턴 지양해야겠고 하루속히 교우들 가정마다 빠짐없이 「가톨릭시보」를 구독하여 우리 교우일반의 수준을 높이고 나아가 「가톨릭시보」 앞날에 무한한 발전있기를 천주님께 기구 하나이다.
- 죽음을 앞두고 병상서 처음 읽어 / 大邱 金남필씨
▲김남필(바오로 35세, 제3항(204~5백호까지 보관자)에 해당, 대구시 남구 남산동 2구 225번지, 대구 남산성당 대구대교구본부수위(상이군인)
낡은 고본집 같은 제본이된 신문철을 다락에서 내온 김바오로씨는 이건 인제 자기에겐 하나의 귀중품이 되었다고 했다. 진종일 지켜야하는 수위란 직업이 지루하고 또 늘 매인 몸이라 교리 반에 자주 갈수 없어 교리를 알기 위해 모으기 시작했는데 이즘은 매주일 「시보」 기다리는 것이 낙이 되었다고 한다. 한번은 부인이 자기없는 사이 한부를 남에게 빌려주어 잊어버렸는데 그걸 오랜 후에야 알고 구해놓느라고 무척 애를 먹어 하마트면 내외간에 싸움까지 할번했다고. 지금도 학생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가끔 와서 열람하고 간다고 한다. 김씨가 처음 「시보」를 대한 것은 7년전 제27육군병원병상에서 중환자로 위기에 있을때 한 중사가 그에게 교리책과 「시보」를 들려준 때부터다.
그것이 또한 그가 영세한 동기가 되었다. 끝으로 그는 몹시 어려워하면서 한가지 청탁을 하겠다고 했다. 그것은 지금은 생사조차 모르는 자기에게 맨 처음 교리책과 「시보」를 준 7년전 병상의 전우 남형학씨의 행방을 「시보」를 통해 알 수 없을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