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文化界 / 具常(詩人·本社論說委員)
物質아닌 文化意識의 問題
▪敎會文化施策 아직도 前近代性 못 벗어나 作家(작가)의 敎會知識貧困·信仰情性(신앙정성) 탈피해야
솔직히 말해서 새해에 課題를 내걸 만큼 한국의 가톨릭 문화란 形成되기 이전이라는게 옳겠다. 물론 여기에서 문화란 創達的인 文學藝術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다.
한편의 詩, 한편의 小說, 한편의 음악, 한폭의 그림 중에 이것이 한국의 가톨릭 예술이라고 어디 내놓을만 한게 있는가? 그야 나도 切頭山 성당을 비롯해 우리의 손으로된 몇개의 교회 건축물이나 그내 부의 造型物들을 안다. 또 福音讚歌의 歌詞나 그 歌曲을 안다. 또 가톨릭 紙面에 때마다 실리는 文學作品들도 보고 있다. 또 지난해 그래도 特記할 殉教劇의 上演도 간접적으로나마 그 原作審査때부터 參與한 사람의 하나다.
또한 이러한 創造的 作業에 노력한 敎兄들에게 뜨거운 友情을 가지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자신을 포함해서 우리들이 오늘날 해오고 하는 所謂 가톨릭的 作業들이 정녕 一般的인 意味에서나마 創造(作)라고 또는 藝術的이라고 이름 할 수 있는 것일까? 더우기나 韓國이라는 固有性마져 내 걸수 있을까?
이렇게 말하면 마치 누구를 號令하려드는 줄 오해받기 쉬우나 그런게 아니라 소위 우리 文學藝術의 從事者자신들의 省察을 먼저 앞세우려는 意圖에서다.
이런 우리의 가톨릭 藝術의 不毛要因을 斷的으로 지적한다면 그것은 우리들 자신의 가톨릭적 知識(가톨릭神學이나 藝術믜 問題意識)의 貧困과 信仰의 타성에서 오는 것이다. 실상 가톨릭의 神學者가 無神論을 부르짖고 나서는 오늘의 狀祝속에서 한국의 가톨릭, 우리 作家, 藝術家들은 가톨릭의 神學的 知識이 무엇인가. 『人間의 背德을 우리는 聖人처럼 否定만 할 수 없기에 作家다』라는 (푸람소아·모리약) 가톨릭作家들의 藝術的 問題意識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고민하고 무엇을 創作했는가. 우리는 참말 미사참여하고 성사봄으로써 信仰人이며, 또 그것으로 가톨릭 藝術을 낳을 수 있을까. 우리 韓國의 作家라는 사람이 그렇듯 西歐人들이 基督神을 自然스럽게 받아들이듯 아무런 特有한 內的體驗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렇듯 自省의 反問늘 어놓자면 限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 부터 출발되어야 함에는 틀림없다. 말할 나위도 없지만 내가 泰朴한 敎理信仰을 부정하거나 輕視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一般的인 現代藝術을 成立시키는데 있어서도 젊은 이와 同一한 것이라 하겠다.
이에 대한 해결책이란 첫째 가톨릭의 知的耆得이며 둘째 신앙의 不斷한 十字架的 爭鬪다. 둘째것은 各者의 誠實에 맡기려니와 첫번째 것은 역시 교회의 人的 物的 配慮가 필요하다. 아니 이렇게 抽象的으로 말할게 아니라 가톨릭의 文學學藝術人을 指導할 司祭가 나와야 하며 그들에게 가톨릭의 神學的, 藝術的 지식을 供給하는 「세미나」나 敎育長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것은 主敎님들이 그 切實性만을 體惑하신다면 나는 우리 敎會사정으로도 실현가능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이와 倂行하여 그들(가톨릭信者 文學藝術人)들에게 그들의 創造活動의 舞臺를 교회에서도 助成해 주어야 한다.
너무 신랄한것 같지만 斷的인 例를 하나 들자. 한국 가톨릭 綜合誌라고 불리울 「가톨릭靑年」이 編輯者 單一人으로 原稿料도 아마 1枚에 40원인가로 제작되고 있다. 이런 前近代的인 雜誌經營이 무엇을 意味하는가에 無心한 自體가, 敎會文化事業자체가 얼마나 非文化的인가를 反復하는 것이다.
이런 말을 하면 돈이 없어서라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斷言한다. 이것은 돈의 문제가 아니고 文化意識의 문제라고-.
新正初부터 險囗를 늘어놓은 것 같아 붓을 놓는 필자 자신이 유쾌치 않다.
그렇지만 이것이 韓國가톨릭의 당면한 文化課題라고 所信하기에 가림없이 써보는 것이다.
■ 平信使徒職 / 金榮煥(大邱가톨릭액션協議會 指導神父)
特殊使命 아닌 全信者 義務
司祭職隷屬 아닌 自發·協助·自主性 確立
團體間 紐帶·命令系統의 一元化 緊要
이번 公議會에서는 많은 헌장과 율령 또 선언문이 발표되었고 特別히 平信者使徒職에 關한 율령이 發表된 것을 우리平信者들에게 여태까지 몰랐던 다른 한일을 부여 해둔 것이라 믿는다. 지난 2월에는 성청안에 平信者使徒職을 위한 事務局을 설치할 만큼 일의 重要性을 明示한 것이다. 事實 敎會헌장 4장 30절에는 平信者에 관하여 敎會가 어떤 태도로써 平信者들을 인도해야하는가에 對해 언급되어 있다.
「로마」(12의 4~5)서를 인용한 그 율령은 『성스러운 교회는 하느님의 제정으로 감탄스러운 다양성으로 질서지어져 있으며 통치되고 있다. 대저 우리는 한몸의 많은 지체가 있으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지지 아니하는 것과 같이 우리 모든 이는 그리스도안에 한몸을 이루니 각각 서로 지체가 되느니라』했다.
위 것을 前提로하고,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문제된다. 첫째로 모든 신자들이 하루 속히 알아야할 것은 平信者使徒職에 관한 基本精神이다. 많은 사람이 생각하기를 平信者使徒職을 司祭職에 억매어 자주성이 없는 일로 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이고 넓은 의미에서 사제직은 使徒職에 한 部分임을 알아야 한다. 물론 平信者使徒職은 교회의 지시를 받아 主敎의 命에 움직여야 한다. 비오 12世가 『平信者使徒職은 主敎의 손과 발의 연장이다』라고 하셨다. 司祭들 역시 主敎의 「인스트루맨뚬」(道具)에 불과하다는 것을 볼때 司祭職은 平信者使徒職에 협조하는 것이지 指令을 내려 命令하는 것은 아니다.
敎會에 관한 율령 40장 30절에 明示되어 있는 것을 보더라도 즉 司祭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것은, 세계에 향한 교회의 전구원 사명을 자기들만이 도맡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신자들이 자기들 나름의 방법으로 공통된 일에 칠치 협력하도록 그들을 사목하고 그들의 봉사와 「카리스마」를 인정해야한다는 것이 司祭職의 임무라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自發的이고 協助的이고 자주性있게 일해야 하는 精神을 가져야 할 것이다.
둘째로 平信者使徒職은 누가 할 수 있나? 율령에 보면 『영세와 견진을 받은 모든 신자들은 그들 나름의 使徒職에 소명을 받았다』라고 되어있다. 어떤 사람만이 하는 特殊使命이 아니라 全信者가 해야 된다. 各自의 능력과 역량에 따라 환경 고유의 특수性을 살려 敎會가 必要로 하고 要求하는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럼 具體的으로 우리가 해야 할일을 새해의 새 기분으로 하나씩 정리해 나가보자. 첫째 各團體의 유대강화다.
모든 信者團體는 神秘體內에 한 部分을 맡고 있기 때문에 한몸이 完全完成하려면 그 어떤 部分도 서로 有機的인 유대가 必要하다. 둘째는, 그에 따르는 組織問題인데 한 몸의 머리가 하나이듯이 敎會內에 있는 各團體는 命令係통의 一元化가 되어야 한다. 이런 뜻에서 大邱大敎區의 「가톨릭 액션 團體協議會」는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셋째는 직접 一線에서 活動하는 團體에 加入 하지 않은 平信者들의 協助문제다. 대개의 경우 나는 그 단체에 속해 있지 않으니 모르겠다. 『우리 집에는 학생이 없으니 學生운동에는 내가 왜 참 여해?』식의 사고방식은 율령 基本精神에 위배될 뿐아니라 크리스찬 精神에 反對된다.
結論的으로 보아 平信者使徒職에 대해 關心을 가지고 이것이 내구원의 방법이요, 同時에 信仰의 表示라는 것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어느 누구만이 해야 할일이 아니고 神秘體의 한部分을 담당한 各自는 最善을 다해 敎會事業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것이 천주를 사랑하는 길이다.
■ 對話 / 朴甲成(서울大美大學長)
敎會 共通話題 廣場없는 危機
沈默 忍從을 美德·은신처로 錯覺해서야 對話없이 理性發展 自由없어
요즘 「對話」니 「廣場」이니 하는 말이 여기 저기서 새삼스럽게 登場되고 있다. 말뿐이 아니라 實踐에 옮겨지고 있고 現代生活에 있어서 없을 수 없는 하나의 方法 내지는 要因으로 되어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하면 「대화」라는 말의 뜻이 새로워졌다기보다는 「對話」의 必要性이 再發見되고 그 實效性이 막대하다는 것을 再認識하게된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말많은 世上이요, 시끄러운 세상인데 이 이상더 對話를 하면 말이 더 많아지고 더 시끄럽고 더 어지럽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실상 그러한 時代가 있었고 아직도 그러한 社會, 그러한 國家도 있다. 議論은 해서 무엇하느냐 命令해버리면 그만이지 理論이 무슨 쓸데있느냐 행동이 제일이지 말보다 권위, 말보다 힘을 내세우는 社會가 어떠한 社會인지 우리가 다 알고 있으니 더 말할 必要가 없다.
한편 딴 意味에서 沈黙의 美德도 있다. 『沈黙은 金이다』라는 敎訓도 있다. 그러나 이런 뜻의 침묵은 對話가 단절된 狀態가 아니라 오히려 無限한 對話속에 있는 상태라고 보겠다. 같은 침묵이라도 强者의 沈默은 威壓이요, 强者의 沈默은 不安이라고도 한다. 强者니 弱者니 하는 것은 人間의 본질이 아니므로 論外로 한다.
人間과 人間이 「對話」한다는 것 이것은 人間性의 본질에 속한다. 人間이 「對話」하기 위해 어떠한 「廣場」을 마련한다는 것 이것은 人間생활의 本質에 속하는 것이다. 人間이 理性的動物이라는것, 人間이 역사적이고 社會的인 存在라는 眞理의 必然的인 歸納이다. 對話없이 人間理性은 발전하지 않으며, 理性없이 對話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만일에 對話가 없다면 理性이 없다는 것이 되고, 理性이 없으면 자유가 없을 것이고, 자유없으면 人格이 없게 된다.
이런 뜻에서 요즘 「對話」를 원하고 그 必要性을 깨닫고 「對話」에 의하여 문제를 풀어가겠다는 요구가 현저해졌다는 것은 대단히 좋은 현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對話」가 요구되는 現代社會는 反面 문제가 많다는 뜻이고 혼란하고 시끄럽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말은 말로써밖에 막을 수 없는 것이다. 시끄러운 것은 對話를 많이 해서가 아니라 對話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는 「쏘피스트」들의 시끄러운 混亂을 「對話」로써 막아낸 셈이다. 모든 混亂은 理性의 混亂이다. 理性을 바로잡지 않고 混亂을 除去하는 方法이란 없다. 現代의 混亂에 比하면 「쏘피스트」 時代의 混亂은 素朴하다. 그 時代는 적어도 共通話題가 있었다. 그러기에 쏘크라테스는 廣場에서 靑年들과 對話를 할 수가 있었다고 본다. 그리스 사람들은 孤獨하지 않았다. 現代人은 孤獨하다. 共通된 話題가 없기 때문이다.
가톨릭敎會에서 「對話」가 要求된다는 것은 반가운 現象이기도하며 悲劇이다. 왜냐하면 太初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은 곳 天主라고 하는 이 敎會에 「對話」가 斷切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共通話題가 없다는 것은 말이 안되며 우리에게 廣場이 없다는 것은 口實이 안된다. 多幸히 「祈求」가 살아있다. 「祈求」는 天主와의 「對話」이다. 그러나 이것을 핑계로 沈默과 忍從을 無能의 美德 또는 隱身處로 錯覺한다면 대단히 危險하다.
■ 社會參與 / 신태민(言論人)
實踐할 機構없어 意見 充實, 모두 傍觀者되는 危險막고
信仰心의 相互격려·전교 위해 「클럽」 활동 긴요
나는 여기서 주로 形而下學的 가톨릭 안의 기품을 중심으로 한국 가톨릭 안의 體質改善을 생각해 본다. 가톨릭을 일컬어 「무서운 조직력을 가진 종교단체」라고 말하는 정치인이 있었다.
그러기에 선거때에는 상당히 입후보자들이 이 「무서운 조직력」에 힘입으려고 유혹의 손을 뻗치는 지도모를 일이다. 신앙을 토대로 엉킨 조직체인데다가 성직자말에 순종하는 것을 1급의 미덕으로 여겨오는 우리들로선 과연 「무섭게 단결된 조직체」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근대화 작업이 서둘러지고 있는 이때 그 신앙의 유대만을 밑천으로 교회행정을 꾀한다는 것은 무척 주먹구구식 행정으로 이 무서운 조직체를 포장하는 격이 될 수밖에 없다.
사실 교회 내에 부서가 하나 생기고 없어 지고가 신앙핵심체에 어떤 상처를 주거나 크게 보탬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원활한 운영을 위해서는 크게 생각해 볼 문제라 하겠다.
언젠가 고 마해송 선생께서 가톨릭시보에 『천주교회에 전화를 한번걸려면 번호를 찾는데 무척 신경이 씌어진다』는 요지의 글을 쓰신적이 있다.
어떤 성당에서는 전화번호부에 「천주교 XX교회」로 등록되어 「천」자 항목을 찾아야 하고 어떤 성당은 교회 이름부터 밝혀 「XX동 천주교」로 있고 어떤 곳에는 「가톨릭 XX협회」로 되어 있으니 제발 이런 것들이라도 통일해 줬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태가 지났어도 전화부에는 여전히 과거와 매한가지다. 마해송 선생의 의견에 공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평신도의 좋은 의견이 받아들여질 기구가 없어 실천에 옮기지 못한 점이 더욱 주요한 문제인 것이다.
흔이들 남의일 처럼 말하는 「좋은 일」 「옳은 일」이 그 얼마나 성직자 간에도 많고 평신도간에도 많은가?
한때 「매스콤」에서 교황을 「法王」이란 일본 번역식 낱말로 써 왔었다. 그때 가톨릭중앙협의회에서 「夏祥클럽」(과거 각계각층의 인텔리로 구성돼 있었던 서울교구의 기구)의 제의에 의해 가톨릭용어 통일안을 만든 적이 있다.
나는 신문사에서 직접 실무자로 있었기 때문에 주교를 僧正으로, 신부를 僧여로, 修女를 姉妹, 교황을 법왕으로 그릇되게 번역하는데 무척 신경을 쓰고 있던 참이라 「통일안」의 출현을 무척 다행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각신문사 통신사에는 이 「교회용어집」이 곧잘 활용되어 간신이 3·4년이 지나는 동안 「법왕」이 신문지상에서 자취를 감추고 옛부터 사용해온 「교황」을 쓰게끔 되었다. 「평신자」란 용어도 「신자」면 「신자」지 「높은 신자」 「평신자」 「낮은 신자」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미 「평신자사도직」이란 말이 굳혀졌으니 나도 그렇게 쓴다. 만일에 전문가들에 의해 「信者사도직」이라고 말을 고친다면 우리는 또 따를 것이다.
가톨릭안의 인간관계는 일반적으로 냉냉하다는 평이다. 가톨릭인에는 「유아독존」적인 면이 있다고 혹평하는 이도 있다. 교우들끼리도 서먹서먹한 관계가 많다. 신문교우는 미사참례만 의무적으로 하면서 무척 외로워하고 있다. 신앙심의 상호격려를 위해서 활발한 「클럽」활동이 여기저기서 번지고 있음은 유쾌한 일이다.
성직자간의 관계, 회장과 신부와의 관계, 본당신부와 보좌신부와의 관계, 신부와 교부와의 관계 속에서 우리는 세균성적 이나마 우울한 얘기를 가끔 듣게 된다. 가령 판공성사 때, 고해신부의 노고가 짐작이 되지만 몇시간을 고해를 안에서 추위에 떨고 계신 신부님의 사정은 아랑곳 하지 않고 죄인들의 행렬은 길다.
때가 되면 고해신부도 끼니를 때워야하고 화장실 출입도 하셔야한다.
그러나 이런 때는 고해보러 온 교우들에게 한마디라도 「엑스큐즈」를 해줬으면 하는 행렬진 교우들의 일방적인 욕심이 있는 것이다.
이외에도 보좌신부 의사무한계라든지 회장회의 결의사항에 대한 존중여부 문제라든지 주일학교 교사의 교육문제라든지 전교에 필요한 다양한 심리적연구(환자에게 전교할 때 인텔리를 상대할 때 노인들을 전교할 때 대상에 따라)라든지-어지간히 인간관계 측면에서 다룰 문제가 많을 줄 안다.
이밖에도 전교구의 통합기구에서 「가톨릭문화상」 같은 권위있는 상제도를 만들어 평신자로서 가톨릭의 좋은 본을 국가적으로나 국제적으로 보인분에게 수여하도록 하여 간접적인 전교책을 취했으면 싶다. 장면박사라든는 안익태 선생 같은 분도 그런 수상대상자는 되지 않을가?
그리고 가톨릭 기관에서 고용된 사람들에 대한 신분보장 사회보장 같은 문제도 제도상으로 연구되어 몇10년씩 일해온 「종직이」나 「사무원]들이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소릴 듣지 않도록 하는 문제도 큰 일이다.
婚喪禮에 대한 것도 성복제문제라든지 三우제나 五우제와 같은 유교적인 또는 百일제같은 불교적인 제사 따위를 그냥 답습할 것인가? 가톨릭묘지 운영도 전면적으로(구획정리·묘형태 등등) 재검토할 것인가?
그리고 혼례에 있어서도 혼배미사 후 불란서에서 처럼 혼인신고증서에 도장을 받아 본적지에 후송하는 방법 같은 것은 불가능할 것인지?를 비롯한 가지가지 문제.
자잘구레한 이같은 문제가 결국 가톨릭의 체취를 발산하는 것이다.
누구나 상식적으로 말하는 이같은 가지가지의 문제를 자모이신 성교회에서는 어떤 기구에서 어떻게 받아들여 어떻게 검토되어 어떻게 실천여부가 결정될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가톨릭의 근대화는 합리적인 기구편성과 적절한 인물배치로 이루어지어 모두가 방관자되는 위험을 막아내야 할 것이다. 『평신도들이 다 해야지』 이 구호만을 갖고는 힘들다. 평신자들이 참여하체질형태가 먼저 바뀌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