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年(년)에 韓國敎會(한국교회)가 해야할 時急(시급)한 일 (3)
本堂新設(본당신설)…敎區的(교구적) 募金(모금)
敎務金(교무금) 增額(증액)코 依他心(의타심) 버려야
司祭(사제) 不足(부족) 메울 大衆司牧(대중사목) 時急(시급)
발행일1967-02-26 [제557호, 1면]
信徒 수의 증가가 현저함에도 不拘하고 그들의 質的水準의 向上이 이에 따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敎會施設이 빈곤하고 聖職者 數가 모잘아 늘어나는 信徒를 제대로 모시고 靈神生活을 지도해 나가는데 큰 支障이 있다는 것 - 이것들이 아마도 韓國天主敎 現況의 특징을 규정짓는 것이 아니겠는가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나라 天主敎 現況이 특징을 이처럼 규정할 대 우리 天主敎가 금년 한해를 두고 重点的으로 해결지을 問題는 다음과 같지 않나고 나는 생각한다.
첫째로 天主區單位로 敎會新設운동을 벌이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 敎會에서 딴 敎會가 갈려나가 新設되는 경우 그 新設費用이란 주로 그 地區 信徒들이 담당해온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와같은 新設方式은 勞多功少하여 敎會新設事業에 別로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例로 내가 다니는 서울 阿峴聖堂에 의지컨데 협소한 聖堂에 近8천여명의 信徒들이 다니고 있어 新村이나 東橋洞 부근에 敎會를 하나 新設해야될 必要는 벌써부터 통절하게 느껴지고 있지만 수千萬원에 달하는 設立基金을 阿峴성당에 속하는 信徒들의 힘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너무도 벅찬 일이요 이런 과업을 1·2年內에 解決하기란 事實에 있어서 불가능한 形便에 놓여있다.
이는 비단 阿峴 · 新村地區에만 해당하는 現象이 아니라 서울市內 人口가 새로 密集 增加하게된 地域에서는 거의 보편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現象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나의 생각으로는 敎會를 新設하는데 敎區單位로 信徒에게 널리 모금하고 敎區의 立場으로 보아 가장 긴급한 解決을 요하는 地域을 선정하여 거기에다 敎會를 신설해 나가는 것이 가장 合理的이 아니겟는가고 생각한다.
敎區單位로 모금하여 敎會를 신설하는 운동을 벌인다고 하면 적어도 서울大敎區의 경우 1년에 한 두개의 敎會를 거뜬히 신설해 나갈 수 있지만 이를 성당別로 모금하고 新設키로 한다고 하면 한 敎區單位로 보아 2-3년이 걸려도 敎會 하나를 신설하기가 아렵다는 事情을 直視해둘 必要가 있다.
둘째로 어느 聖堂을 불문하고 信徒들이 敎會에 바치는 돈을 부쩍 늘이는 운동을 展開해야 한다. 우리나라 天主敎徒들의 經濟的인 面에서의 他力依存 경향은 거의 고질化 해버려 外國에 대해서도 國內 다른 宗敎에 대해서도 창피스러워 그 實情을 털어놓기 조차 부끄러운 形便이다. 내가 알기로는 「敎務金條」로 한달에 10원 乃至 20원을 敎會에 바치고 미사연보로 每主日 몇원 乃至 1-20원을 바치는 信徒가 不知其數요 8千餘名의 信徒를 거느리는 聖堂이 信徒로부터 받아들인느 돈의 總額이 겨우 2千名의 信徒를 가진 프로테스탄트 某敎會가 信徒로부터 걷어들이는 總額보다 모자라는 경우도 있는 것 같은데 都大體 이 어찌된 셈인가. 나는 가톨릭을 믿는 가정의 生活水準이 非가톨릭系 基督敎를 믿는 가정의 生活水準보다 떨어진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信徒의 生活水準이란 지역마다 차이가 있는 것이지만 平均해서 본다면 가톨릭 信徒의 生活水準은 다른 宗敎 信者들의 그것에 比해 別로 差違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不拘하고 가톨릭信徒가 敎會에 돈을 바치는 데 있어서 유달리 인色한 까닭은 敎會를 자기네들의 힘으로 유지해야 겠다는 自立정신이 너무도 모자라기 때문일 것이다. 韓國의 가톨릭은 지금까지 發展과정에 있어서 外國원조에 依存하는 바 매우 컸었다는 것을 솔직히 시인한다 하더라도 信徒 수가 80萬에 육박해오면서도 外國依存을 면할 수 없다는 것은 分明히 수치스러운 일이요 民族的인 自負心을 송두리째 꺾는 일이 아닐 수 없다. 敎會에 바치는 돈은 가톨릭 敎會의 유지발전을 위해 쓰는 돈이요, 信徒의 入場으로 본다면 天國에의 旅費를 預置해 두는 것이요 現世의 享樂보다 永生을 더 소중히 아는 가치라고 하면 절대로 지출을 아껴서는 안될 돈이다.
이런 意味에서 나는 우리 가톨릭신도들이 原始基督敎時代의 정신이나 制度를 본받아 收入의 10분지1을 항상 교회에 바치는 운동을 자발적으로 전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셋째로 聖職者들의 信徒들의 靈神生活을 지도해 나가는데 있어서 좀 더 「라아스날 콤뮤니케이션」에 置重해 주었으면 한다.
現代는 바로 「매크콤뮤니케이션」의 時代요, 또 우리 社會에 있어서는 신도 수에 比해 성직자 수가 너무도 모자라기 때문에 個人의 신도들의 靈神生活에 깊이 파고들어가 個別的인 지도를 한다는 것은 심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신도들의 놓여있는 現實的 환경을 파악하고 個別的 郵遞적 지도를 주어나갈 必要는 여전히 큰 것이니 성직자들은 바쁜 시간을 틈타서라도 個別接觸의 機會를 꾸준히 갖도록 함이 좋을 것이다.
이 点과 관련해서 한마디 附言하고 싶은 것은 敎會가 知識層을 널리 글어들여 이들을 일정기간 각별히 훈련하고 平信徒로서의 使徒職을 맡겨 聖職者의 손 不足을 메워나가는 것이 過渡措置로서 必要치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인테리」란 政治에 있어서도 宗敎에 있어서도 大衆社會에의 媒介 역할을 하는 것인데 지금까지 우리나라 天主敎는 傳敎에 있어서 「인테리」가 가지고 있는 이런 역할을 너무 소홀이 취급치 않았나 하는 것이 나의 未熟한 생각이다.
한국 天主敎도 바야흐로 轉換期에 들어선 것 같은데 變遷하는 시대환경 속에서 건전한 發展을 기하려면 一大改革이 있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