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議會(공의회) 精神具現(정신구현)을 위한 刷新(쇄신)의 道程(도정) ④
教理(교리)·實踐(실천) 遊離(유리)돼서야
聖職(성직), 支配(지배)아닌 奉仕(봉사), 過恭(과공)으로 信心(신심) 奇形化(기형화)
內容(내용)과 表現(표현)의 一致(일치)
우리는 前에 교회쇄신의 방향은 교회생활의 다양성을 살리면서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이라야 된다고 주장하였다. 이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들의 신앙내용과 그 표현방법이 일치해야만 교회의 본모습이 정확하게 나타날 수 있다.이것은 倫理的인 의미에서 言行一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리와 실천의 부합을 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까지의 교회생활이 교리와 실천이 유리된 상태에 있었다는 말이 아니다. 보다 완전에 가까운 일치를 향하여 나아가야 된다는 뜻이다. 성신의 감도로 인도되는 교회는 歷史上 단 한번이라도 正統信仰을 가르침에 있어서나 유지함에 있어서 탈선한 일은 없다. 다만 시대에 따라서 교리의 어떤 面이 더 강조되거나 덜 해설된 것은 있었다. 그러나 생활면에 있어서는 언제나 어디서나 충실히 교리 그대로 정확히 실천되었다고는 주장할 수 없다. 몇가지 예를 들어서 생각해 보기로 한다.
■ 聖職의 본질과 그 行使와의 관계=예수께서 베드로와 12사도위에 교회를 세우고 성직의 임무를 주신 것은 신자를 성화해서 구원의 길로 인도하기 위한 도구 내지는 봉사기관으로 주신 것이다. 신약성서가 말하는 사도직은 지배권이 아니라 사랑의 봉사직이며 따라서 교황이나 주교는 구약의 대사제나 로마제국의 대제관이 아니라 바로 「착한 목자」이다. 그런데 역사상의 교회가 조직화되고 제도화됨에 따라 착한 목자인 교황직이 어느새에 君主가 되고 성직자들이 관리가 되었고 그 잔재는 오늘까지도 계급주의와 권위의식으로 성직사회를 멍들게 하고 있다. 우리는 교황을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로 믿고 있지 교회라는 국가의 황제라고 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교황을 君主로 대하고 신자는 그 臣民노릇을 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어떤 신학교과서에는 교회론의 대부분이 교황의 權力論으로 시종하고 있음을 본다. 물론 여기에는 역사적 유래가 있기는 하다.
중세초기의 문란한 규율을 바로잡기 위하여 강력한 교황권의 발동이 필요했고, 프로테스탄 개혁론자들이 예수친히 세우신 교직제도를 공격할때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교계제도 특히 교황직을 옹호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극단적인 제도론은 쉽사리 사제성적의 본질을 은폐하고 신앙내용과 실제현상의 유리를 초래한다. 이번 공의회는 열띤 논쟁의 시대를 초극하고 교리와 실제와의 보다 완전한 일치의 길을 마련하였다. 교회헌장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참된 자세를 설명하기 위하여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으며 주교직에 관한 율령과 사제생활에 관한 율령에서도 진정한 성직의 本領 즉 사랑의 봉사직으로서 성직을 갈파하고 있다.
■ 信心과 그 行事와의 관계=흔히 비가톨릭인들은 우리를 형식주의자 또는 우상숭배자라고 비난한다. 대중이라는 것은, 남을 판단할 때 그 겉모양에 치중하지 内心까지를 파악하려고 들지 않는다. 따라서 가톨릭에 대한 비난의 상당수는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의 일상 행위가 언제라도 충분히 변명할만한 상태에 있다고 자부할 수도 없다.
우리 신앙의 대상은 神人그리스도 그분하나뿐이지 그 어떤 위대한 성인들이 아니다.
우리는 하느님만을 흠숭지례로 경배하고 다른 훌륭한 성인들은 그저 공경할 따름이다. 그러나 가톨릭신자들의 信心行事가 많은 중상과 모함의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이것을 단순히 비난자들의 악의나 무식에만 돌려도 좋다고는 볼 수 없다. 실제에 있어서 많은 신자들은 천주흠숭과 성인공경의 범절을 혼동하고 있다. 아주 흔한 예를 들어보자.
성모 마리아께 대한 가톨릭의 신심은 지극히 타당하고 근거 있는 것이나 그 표현 방식에 있어서는 남들이 놀랄만한 것이 비일 비재하다. 성모께 대한 그 많은 책자·상본·동고상설교·봉헌·집회순례·축일의 홍수 속에 파묻혀 예수그리스도의 모습은 희미해지고, 드리는 기도는 성모를 마치 마지막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過恭은 不敬이라는 말대로 분수를 모르는 성모신심은 미사전문 중에도 성모덕서도문을 외우는 현상까지 빚어낸 것이 바로 어제의 일이다.
마리아 신심의 본질은 마리아를 통하여 예수께 나아감에 있는 것이지 결코 마리아를 예수와 대등한 지위로 모시거나 비슷한 표현으로 공경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기어히 칭호까지도 같은 것을 사용하려는 것은 확실히 과공이다. 구세주, 그리스도-|공동구속자 마리아, 중개자 그리스도-중개자 마리아, 그리스도王-마리아 女王 예수성심께 봉헌-성모성심께 봉헌 등등. 이러한 平行主義信心은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초월성에 대한 인식을 흐리게 할 염려가 있으며 마리아 信心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다.
마리아께 대한 모든 교리는 예수그리스도의 강생의 신비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아니하는 한 절대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르드」나 「파띠마」의 메시지가 독립한 구령의 방법론 처럼 선전되는 것을 볼 수 있고 주일미사 참예보다도 교회가 공인하지도 아니한 발현장소를 찾아가기를 더 즐기는 무리가 없지 아니하다.
한마디로 각가지 신심은 예수의 강생구속교리 안에 제 본래의 위치로 돌아가야 한다. 모든 신심행사는 성서적 근거위에서만 조직되고 실천되어야 할 것이고 강생 구속 하신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서 설명되고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종래 인습으로 전승되는 각가지 신심행사는 그 교리 내용에 부합되도록 재검토 재조직 되어야 할 것이다.
공의회는 이미 여러분야에서 수술을 시작하고 있다. 전례계획은 그 대표적 경우이고 비전례적인 신심행사에 대해서도 새로운 연구와 비판이 가해지고 새로운 규범과 법칙을 마련하여 나갈 것이다.
【작년 11월 12일자 제2면서 계속】
鄭夏權(解博·馬山중앙본당주임·本社論說委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