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콜라」 철학대로 어느 존재든지 한질료와 한 형상으로 구조된다.
예컨대 같은 질료(質料)인 재목이라도 거기에 부여되는 형상에 따라 책상도 되고 걸상도 된다. 같은 질료라해서 책상이 즉 건상은 아니다. 이들을 구별하는 것이 본질이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언제나 예수그리스도는 신인이라고 가르친다.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을 겸비한 존재란 뜻이고 다른 두 성이 한 존재에 공존하고 있다는 말인데 이것이 철학상으로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실존인물이었다. 그러니 이 실존은 철학으로 도저히 설명이 안되고 따라서 철학을 초월한 것이다.
이런 불가능사를 하게한 것은 결국 신의 인간에 대한 너무나 지나친 사랑 까닭이다. 『천주 이처럼 세상을 사랑하사 당신 독생성자를 주시기까지 하셨다』(요왕 3·16) 이에 호응해서 사도 바오로는 천주를 『당신 친아들도 아끼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 모든 이를 위하야 붙여주신자』(로마 8·32)라 하였다.
사랑에는 인력(引力)외에 전화력(轉化力)도 있다. 사랑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고 신이 인간이된 것이 성탄이다. 보이는 신이 되었다. 신의 인간화는 확실히 하나의 이적이 아닐 수 없고 오히려 이적 중의 이적이다. 보라 성탄의 신비를!
이 신의 인간화는 그 필요성이 신에게 있지않고 바로 우리 인간에게 있다. 변화가 심하고 부패되고말 인간을 그처럼 신화(神化)시키려는 것이 신의 인간화의 원대한 기도(企圖)다.
인간이 어떻게 감히 신이 되겠는가? 원조 아담과 이브가 『천주와 같이 되려다가』(창세기 3·5) 도리어 인간이하로 저락되었다. 이 욕구를 이제 채워 주시려는 또 하나의 사랑의 광증이 성탄에 나타난다.
『너희는 신들이요, 모든 지존하신자의 아들이로다』(성영 81·6)이 말씀을 예수는 인용하시면서 『너희가 천주『(요왕 10·34)라 불리우는데 하물며 천주의 아들인 내가 왜 천주가 아니겠느냐는 요지의 말씀을 유데아인들에게 하신 적이 있다.
인간의 신화는 신의 인간화와 마찬가지로 자고이래 어느 누가 생각조차 못했던 일이다. 상식적으로나 논리상으로나, 철학적으로도 부조리할 뿐만아니라 절대불가능하다. 그런데 신은 이런 일을 감행한다. 천자(天子)가 인자(人子)가 되고 인자는 천자가 되는 일 말이다.
하기야 극도에 달한 사랑은 사랑하는 상대자를 자신보다 더 높이 평가하고 자신보다 더 높은 위치에 두려는 성질이 있기는 하지만, 인간의 신화는 확실히 이해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신비가 아닐 수 없다.
성탄에 있어서 신의 인간화 보다 인간의 신화가 우리에게는 중점이 될 것이다. 결국 원조가 잘못되려던 신(神)이 잘되게 하려는 신의 미친(?) 계획의 시초가 성탄이요, 그 신비다. 성탄을 축하한다면 인간이 신화될 것과 신이 이렇게 될수 있게 해준 이것이다. 신의 인간화를 통한 인간의 신화로 만물도 승화(昇華)된다는 것이 생명의 신비만 못지않은 또 하나의 신비다. 사도 바오로의 말대로 『모든 조물이 이때까지 탄식하며 산고(産苦) 중에 재생을 기다리고 있다』(로마 8·22) 원조가 범죄한 탓으로 저주를 받았기 때문인고(창세기 3·17) 『부패의 노예지 위에서 구원』(로마 8·21)을 받고자 하기 때문이다.
피조물들은 언제고 신천지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묵시록 21·1)-가 되기를 고대하고 애원한다. 그런데 이것은 신의 자녀들이 그 영광속에 들어간 후라야만, 즉 신화된 후에야만 될 일이다.
얼핏 보기에 만물이 탄식과 고통속에 있다는 것이 이상하다할지 모르겠으나 실지 만물은 만물의 영장(靈長)인 인간의 이용물로 주어지고(창세기 1·16) 그 선용(善用) 까닭에 자기 사명이 완수되게 마련이었는데 그렇지가 못했다. 이 성탄의 신비를 통해서 창조의 목적은 달성된다. 재창조랄까?가 실현된다.
독일의 신비가 TAULER은 세가지 탄생을 말했다. 천주 성자의 성부의 품에 영원한 탄생, 「베들레헴」의 탄생, 그리고 우리 각자 마음속에의 탄생이다. 그런데 위에 말한 성탄의 신비를 두고 신의 의도에 따라 신화의 계단을 밟아갈때 우리는 어느날이고 신의 아들로 신과 동등하게 전국에 탄생될 것이다. 이때 우리는 우리가 현재 「메시아」를 축하하는 이상으로 축하를 받을 것이다. 천주 친히 우리를 축하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우리는 예수와 같은 성부의 다음 말을 들을 것이다. 『너희는 내 사랑하는 아들들이요, 내 가장 기뻐하는 자들이다.』(마테오 17·5 참조)
崔益喆(서울 里門洞본당 주임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