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에 얽히는 추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성냥파는 소녀」가 나타난다. 춥고 추운 북구의 어두운 밤 흰눈이 내리고 쌓이는 거리에 혼자 성냥파는 고아의 소녀는 떨면서 서있다. 창너머로 들여다보이는 집안에는 크리스마스의 나무가 곱게 장식되고 벽난로에 나무가 소리내며 탄다. 같은 또래의 아이들은 크리스마스의 선물을 안고 기뻐하며 크리스마스의 성찬이 준비된 식탁위에 촛불이 켜졌다. 소녀는 부러운 생각조차 없다.
부러워하기에는 너무나 거리가 먼 광경이기 때문이다. 그저 춥다. 못 견디게. 소녀는 저도 모르게 팔려던 성냥을 긋는다. 한가치의 성냥이 언 몸을 녹일 까닭은 없지만 그의 손은 또 한가치를 긋는다. 그리운 어머니의 얼굴이 한가치의 성냥이 밝힌 그 약한 밝음 속에 떠오른다.
『어머니!』
그는 애절하게 부른다. 그러나 한가치의 성냥은 이내 꺼진다. 소녀는 또 한가치를 긋는다. 어머니의 얼굴을 보기 위하여. 이리하여 소녀는 가졌던 대로의 성냥을 모조리 그어야만 했다. 그리운 어머니의 부드럽고 따뜻한 품에 안길때까지-
누구나가 아는 「안델센」의 이야기다. 오랜 오랜 전에 읽은 이야기때문에 어쩌면 나의 기억에 착오가 있을지 모른다. 크리스마스날이 아니고 다른 날에 일어났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추억 속에서는 이야기는 언제나 크리스마스날밤에 있었던 일이고 이 애절한 이야기를 상기할 때마다 나는 종소리와 성가 소리를 듣는 것 같다. 불쌍한 소녀의 승천은 가슴아프도록 가엾지만 그는 천국을 확신했었을 것이라고 어린 마음에도 성총의 표현에 감동하였던 것을 기억한다. 나의 어린시절에는 성탄은 믿는 사람에게만 「날」이었다. 따라서 거룩하고 영광스럽고 기쁜날이었다. 엄숙한 기쁨 속에서 이날을 축하했었다. 어둡고 고요한 밤을 촛불이 밝히고 성가소리는 그 고요를 깨었다기보다 오히려 더욱 느끼게 하였다. 크리스마스의 선물도 야단스럽지 않고 형식적도 아니고 성자의 강림을 축하하는 정성이 어렸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것이 어느때부터서인지 이 성스러운 밤이 소란한 밤으로 변해진 것 같다. 신을 믿지도 않은 사람들이 따라서 성자의 강림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이날을 소란하고 속된 밤으로 돌변시켜버린 것이다. 성탄에 아무런 의의도 느끼지 않으면서 허영된 선물의 교환이 성행되고 교회에 가는 대신 외잡(猥雜)한 장소에서 난잡한 모임을 갖는다. 거리를 떼를 지어 성탄날에 불러서는 독신(瀆神)이 될 잡스러운 노래를 떠들며 부르나하면 해마다 이날밤에 적지않은 사고까지 일어난다고 들었다. 이런 소란 속에서는 성냥파는 소녀가 있다하더라도 켜는 가지마다에 어머니를, 천국을 보지는 못할 것이리라- 죽어간다 하더라도 버림받고 암흑 속에서 그저 얼어 죽어가야만 되었으리라. 다만 사회문제만 남기고 아무런 영혼의 구원도 없이.
나는 외국의 성탄축하를 잘 모른다. 듣기에는 이날을 그들은 교회와 가정에서 조용하게 거룩하게 지낸다 한다. 가족만이 모여서 손님을 청하는 일조차 드물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크리스마스하면 또 하나의 이야기를 상기하게 되는 버릇이 있다. 워싱톤아이빙의 크리스마스 견문이다. 그가 오래 동경하다가 찾아갔던 영국의 어느 지방의 크리스마스 풍경이다.
난로에는 크리스마스 「시이즌」 동안을 꺼지지 않고 탈수 있는 굵은 통나무- 이 계절을 위하여 특별히 준비된 굵은 통나무가 타고 있다.
주방에는 오가는 길손을 남김없이 배부르게 할 수 있는 성찬이 푸짐히 마련되고 사람 좋은 뚱뚱한 주인은 사람대접에 다시없는 만족을 느끼며 이날이 기쁘기만 하다.
이날을 위하여 그는 1년을 부지런히 일해왔고 또 그만한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소박한 신앙의 이 사람은 현세에서 이미 천국을 보고 있었으리라.
아아빙의 묘사를 읽을때 크리스마스란 어쩌면 이런 방식으로 축복하고 축복을 받아야 될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그 추운 북구에 이런 인물이 있었더라면 가엾은 성냥파는 소녀는 거룩하고 축복된 밤에 가냘픈 성냥 빛으로 어머니의 얼굴을 볼 수는 없었을망정 찬밤, 찬거리에서 애절하게 굶고 얼어 죽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 아닌가.
언제나 남의 경험을 내것같이 착오하는 버릇이 있는 나는 성탄날에 조차 내 자신의 추억속에 남의 이야기를 이렇게도 뿌리깊게 박아버렸다.
부끄러운 일일지 모르나 직접 경험이 가난한 나에게는 나를 풍부하게 해주는 것은 결국 남의 이야기들일지도 모른다.
韓戊淑(女流作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