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방만 말고 함께 책임 느껴야 / 현기호(馬山敎區)
無事(무사)·安逸(안일)·꿈없는 神學生(신학생) 生活(생활)서 희망은 지금부터
司祭(사제)로서 根本姿勢(근본자세) 갖춰야 지엽적 부작용 면해
많은 분들이 새 사제들에게는 꿈이 많은 줄 알고 있지만 이제부터 꿈을 그려야할 단계라고 생각한다. 허구 많은 날 우리들에게는 꿈을 꿀, 이상을 그릴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면 비단 나한사람만의 독백일까.
제법 긴 세월동안 신부가 될지 안될지도 모르는 판국에 어떤 사제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할 여유라곤 없었다. 누군가는 약한자여 그대 이름은 여인이라고 했다지만 우리들은 약한자여 그대 이름은 신학생이란 농아닌 농을 곧잘 하곤 했다.
우리는 신학생으로 살면서 누가 가르쳐서가 아니라 피부로 느끼고 또 선배로부터 물려받은 이심전심의 비법으로 무사 안일이란 것을 배웠다. 잘하건 못하건 간에 윗사람 눈에 자주 보이는게 탈이요 네가 아무리 옳다 해도 윗사람과 맞서 가지고서 백해무익이란 생활 철학을 익혔다고 할까? 그래서 무엇을 스스로 하려고 하기보다는 시키는 대로 죽는 시늉을 하는 것이 겸손과 순명의 전부인 줄 알았으니 오늘 우리들에게 무슨 기대를 걸었다간 실망도 이만 저만이 아닐 것이다. 왜 그런지를 묻기보다 어떻게 교육됐는지를 알아보면 좋을 것이다.(용서를 청해야할 것이 있다. 대부분의 착실하고 성실한 동료들에겐 기대를 걸어도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십여년이란 기간이 결코 짧은 기간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결과는 저희를 아끼는 분들의 기대에 크게 어긋나니 확실히 뭔가 잘못된 것이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이 다음 부터는 희망을 걸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니 고목의 구각과 같이 딱딱한 신학교도 공의회의 영향을 받아 바야흐로 해빙기에 들어섰으니 말이다.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이 하나 있다.
신학생 때 곧잘 어른들이나 친지들 수도자들로 부터 많은 훈계를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여자를 술을 돈을 조심하고 반말을 쓰지 말라는 등의 말이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대인관계에 있어서 중요하지 않다거나 또 소극적으로 피하는 방법을 과소평가 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또 작은 것을 충실히 하지 못하면, 완전히 이룰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문제는 선후가 있고 더 근본적인 것과 지엽적인 것이 있다. 예컨대 돌파리 의사라면 병자를 대했을 때 밖에 나타난 상처만 보고 정신없이 처방하겠지만 명의라면 그 병의 근원을 찾아 치료함으로 거기서 파생된 부작용을 일시에 제거해 버리고 말 것이다. 이렇게 볼때 우리게 보다 필요한 것은 근본적인 사제의 정신을 갖도록 자극시키고 끌어 주는 것이 얼마나 더 효과적일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나 세상에 불을 놓으려 왔다』고 말씀하신 그리스도의 대리자인 사제들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이 무엇일까? 영혼에 대한 열성, 고통 중에 있는 자들과 함께 아파하는 마음, 군주로서가 아니라 봉사자로서의 마음 이것이 없다면 사제들에게 무엇이 남을 것인가?
친절하라, 술을 조심하라, 여자를 조심하라, 돈을 조심하라, 이 모든 것은 다 지엽적인 문제들인 아닌가. 사제가 사제의 본 정신에 병들었을 때 따라오는 부작용 외에 무엇이겠는가. 본래의 사제정신을 갖지 않는 한 또 가지려 하지 않는 한 이러한 부작용을 조심하라는 것은 마치 썩은 고기를 두고 파리만 쫓는 격이 될 것이다.
한말로 나는 이런 기회나 또 어떤 때라도 참으로 저희를 생각는 마음에서 또 사제를 생각는 마음에서 말씀하실 분들이 계신다면 인사치레의 인사를 떠나 마음을 더 놓고 훈계든 충고든 해주었으면 싶다.
인간의 약점을 아무리 왈가왈부한다 할지라도 없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오직 한치라도 앞으로 나가도록 밀어 주고 끌어 줌으로 차차 약점도 장점에 눌려 약해지지 않을까 한다.
나는 몇몇 분들로부터 실망의 말을 들은 적도 있고 고무적인 말을 들은 적도 있다. 즉 그분들 하는 말씀이 요사이 사제들은 옛날의 사제들 보다 못하다는 여러가지 얘기를 해 주셨다.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열심히 들었지만 뒤가 개운치는 못했다. 어떻게 그렇게 수도자와 사제, 평신도와 사제가 남남일 수가 있을까 해서다.
어느 한편이 잘 못한다면 책임을 전적으로 거기에만 돌릴 수 있을까? 어찌 한편의 고통을 남의 집 불 보듯 할 수 있을까 실로 의심스럽고 형제애를 부르짖는 저들의 입술이 초라해 보였다. 서로가 아껴주고 협력하고, 서로가 잘못의 책임을 나눠 가지려할 때 우리 모두는 용기백배하여 어려운 항해지만 웃으며 나가지 않을까 한다.
장광설이요 독백이되고 말았다. 결론으로, 앞에서도 말했듯이 어떻게 하겠다든지 하는 설계는 없다. 또 나가서 나는 이러 저러한 행동은 하지 않겠다든가 착한 행동, 남의 모범 될만한 행동만 하겠다는 말은 하고는 싶지만 나도 인간이라서 차마 못하겠다.
다만 바오로 종도 말씀 같이 나도 약점이 있는 인간이니 남의 약점도 용서해 주고 나의 약점도 용서 받고 싶다. 사제의 십자가가 따로 있을리 없으니 공동의 십자가를 같이 지고 서로 밀고 당기고 부축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다.
■ 거룩하고 베푸는 본분 지켜 / 김영재(광주대교구)
주교·선배신부·교우들의 지도 배려가 추진력
실패가 경험될 수 없는 항상 올곧은 생활돼야
사람들은 사제직이라고 하는 고상한 직책 때문에 우러러보고 축하해줄지도 모른다. 참으로 경사임엔 틀림없다. 그렇지만 사제로서의 자격을 갖추었고 그래서 사제직분을 착실히 해 나갈 수 있는지는 스스로 미덥지 않다.
지나온 길을 더듬어볼 때 신학교에 들어올 무렵보다는 새 신부가 되어 나가는 지금이 사제와 사제직에 대해서 더 좀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성서에서, 성인 신부님들의 행적과 사제직에 관한 신심 서적이나 사목 교서에서, 선배 신부님들의 피정 강론과 지도 신부님의 교훈을 통해서 사제가 무엇하는 사람이고, 따라서 모름지기 어떻게 처신해야 되는지 많이 배우고 느껴왔다. 또 열심한 교우들이 제들에게 특히 새 신부들에게 바라는 간절한 부탁이 무엇인가도 들었다. 덕행, 지식, 교양, 정서, 예의, 심지어 개성에 관한 분야에 이르기까지 때로는 추상적으로 때로는 구체적으로 말해주는 것이었다. 대개는 가슴속 깊이 간직하고, 생각해볼 좋은 말들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사제가 갖추어야 할 본질적인 것과 있으면 좋지만 없어서 할 수 없는 장식적인 것도 결들여 이야기 하는 때도 있었다. 공작새는 깃털이 고와서 아름답다고 하지만 사제는 거룩한 것을 지녀야 하고 또 남에게 주어야 된다는 말은 사제의 본질적 요소다. 하지만 천부적 소질과 재능의 결핍에서 오는 어쩔 수 없는 것도 있다. 하여간 새 사제에게 기대하는 바는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이 되는 일, 열심히 봉사하는 일, 신자들을 이해하고 동정할 줄 아는 일, 시대에 적응하는 일, 시공을 초월해서 초연하게 살아가는 일… 이렇게 다짐해 본다. 이제는 사제가 무엇하는 사람이냐? 사제직을 어떻게 실천할 것이냐? 하는 물음에 대해 생각만 하고 있을때가 아니라 배우고 느낀 바를 실행에 옮길 때가 왔다. 씨를 뿌리고 가꾸어야 할 포도밭으로 십자가 앞세우고 가야할 시간이 온 것이다. 나가서 일할 세상이 어떠한지도 속속들이 잘은 몰라도 조금은 보고 들어 알상싶다. 크게 부족하다고 느끼는 점은 사제로서의 됨됨이고 또 사목 실천을 어떻게 해 나가야 할가가 눈앞에 확대되어온다. 뭇 영혼을 책임진 중대한 일이기에 실수 없이 잘 해야겠다. 세상의 다른 일은 혹 잘못해도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자위도 해보고, 남들이 눈감아 주기도 하지만 사제직만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물론 신부도 신부이기에 앞서 사람이기에 틀릴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일반 대학과는 달리 더 긴 연한을 두고 준비시킨다고 본다. 사실 그러고 보면 도리어 짧다고 해야 할게다. 모든 사제들의 원형이신 예수님께서 30세가지나 비로소 공생활을 시작하셨다는 것을 미루어 보아도 가히 알만한 노릇이다. 그래도 당돌하게 나설 수 있다면 오로지 주님의 드높은 사랑, 풍부한 은총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주교님과 기성 신부님들의 따뜻한 지도와 배려하여 주심이 커다란 추진력이 될 것이다. 또한 사제와 함께 교회를 구성하는 평신도 각자의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과 정성어린 협조이다. 교회는 천주의 백성이라고 갈파 했다. 교회는 신부 혼자도 아니며 더구나 신부의 것만은 아니다. 신도 없는 교회는 없다. 공동의 것이다. 그렇다면 공동의 관심사가 아닌가! 평신도들의 새 신부에 대한 기대가 큰 그만큼 협조도 크리라고 확신한다. 잘 갈고 닦아 칼날이 센 칼일수록 힘적게 들고 건을 벨 수 있지만 반대로 칼날이 무딜수록 더 많은 힘이 요구됨이 틀림없는 사실이라면 갖나와 경험없고 알차지 못한 새 신부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공중누각과 같은 멋진 환상속에 살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 시점에서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고 소금이 되라, 하신 완전한 대사제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늘 새로워지고 나아지기로 힘쓰려는 마음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