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蟋蟀(실솔) (13) 보이지 않는 실낱 ⑥
발행일1968-01-14 [제601호, 4면]
이제 정식의 귀에는 강용수씨의 말이 들려오지 않았다.
(그놈이 윤이를 좋아했구나. 그놈이 윤이를 좋아했어)
그 말을 수없이 마음속로 되풀이하고 있었다. 나중에는 자기 자신이 무슨 말을 지꺼리고 있는지 자기감정이 어떤 것인지 그것조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정식은 혼돈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그런데 어떻게 하겠나?』
정식은 멍한 눈으로 강용수씨를 바라볼 뿐이다.
『아무래도 서울로 데리고 가서 전문의에게 상의해 보는게 좋을 것 같은데』
『데리고 가야죠.』
정식이 대꾸했다. 건조한 목소리가 억양없이 울렸다. 정식은 전등불이 높다란 곳에 댕그랗게 매달려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에겐 한가지 근심은 다 있다 하드라만 김사장도 윤식이 때매 속이 썩겠어. 그 양반 호탕해서 우리네 같지 않을 런지 모르지만… 평소에도 도윤식에게는 퍽 무관심한 것 같은데…』
정식은 끓여내 온 차로 목을 추기고 자기를 위해 마련해준 방으로 돌아왔다. 아마 윤식이 쓰든 방인모양이다.
통금의 시간, 멀리, 아주 먼 곳에서 차량이 지나가는 울림이 가끔들려을 뿐, 미칠 것 같은 고요가 사방에서 밀려들어 온다.
(달아나야지, 미국이든 어디든)
꼼꼼히 생각하면 좋은 방책이 있을지도 모르고 일을 정면에서 마주해 당하고 보면 그런대로 견디어 나가는 힘은 생기는 법이다. 그러나 정식은 그러질 못했다. 자기에게 넘어져오는 일이 엄청하게 크고 무거운 것 같고 선택 받았다는 자의식이 갈기갈기 찢기는 괴로움을 그는 당해 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어쩌면 윤이에 대한 사랑도 온실에 있어서의 그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우두커니 앉아서 담배만 태우다가 방안을 둘러보았다. 먼저 윤식의 책상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책상 설합이, 정식은 저도 모르게 책상 설합을 열었다.
지저분했다. 노오트랑 찢어진 종이조각이랑 쓰다만 논문같은 것이 들어있었다. 다음 설합을 열었을때 정식의 눈에 불이 번쩍 당겨지는 것 같았다. 어디서 어떻게 하여 손에 넣은 것인지 윤이의 사진이 있었던 것이다.
(으음… 죽일 놈의 새끼…)
정식은 마치 눈앞에서 윤식이 윤이를 간음하기라도 한 것 같은 착각이 들어 전신을 부르르 떤다.
(처 죽일 놈! 짐승 같은 놈!)
정식은 윤식의 마음을 사랑으로 승화시켜 한번 생각해 보려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윤식의 입에서 나온 그 상스러운 말들이 정식의 의식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윤식의 타락이 윤이로 말미암은 저항의 형태라는 것, 발광의 사태로까지 몰고간 괴로운 심적 갈등이라는 것, 어릴 때부터 외톨이 처럼 한편 구석에서 사랑에 굶주려오다가 사랑의 대상으로 처음 발견한 여자가 형의 애인인 윤이였다는 데서 오는 깊은 좌절감과 함께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집착의 구령창에서 헤어날 수 없게 되었다는 등의 일을 정식은 그중의 하나도 헤아려 보려 하지 않았다.
윤식의 발광은 무서운 혈통의식을 정식에게 심어주어 그를 전율케 했고 이상한 여자집에 갔었다는 윤식의 언동에서 정식은 윤식의 타락을 혐오하였고 윤이에 대한 사모의 정은 더러운 벌래가 윤이에게 달라붙은 듯 한 분노를 이르키게 했을 뿐이다. 통털어 그는 윤식을 불행과 저주의 씨(種)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정식은 윤이의 사진을 끄내어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오욕의 눈길이 주어진 사진을 그는 자기 가슴 속에 집어넣을 수 없었고 더더군다나 그 설합 속에 남겨둘 수 없었던 것이다.
괴롭고 긴밤이 밝아왔다.
정식은 우선 서울에 있는 김일우 사장에게 연락을 하고 이곳 사정, 윤식의 증상을 보고했다.
『할 수 없지. 거기 둘 수는 없으니까 서울로 대리고 와라. 빌어먹을! 병원에 넣어야지. 끝내 말썽이구나』
김일우씨는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시외 통화니까 그렇기도 했겠지만 화가 치밀어 더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차는 어떻게 할까요. 택시를 빌릴까요?』
『차는 보내겠어. 도대체 음… 빌어먹을, 정말 꼴도 보기가 싫다!』
김일우씨는 연신 투털투털하다가 전화를 끊었다.
자동차가 오는 동안 정식은 윤식이 들어있다는 병원에 가지 않았다. 그는 끔직스런 생각이 들어 윤식이를 대하는게 두려웠다. 되도록이면 대하는 시간을 적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자가용이 올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드디어 차는 왔고, 그리고 침묵 속에 모든 절차는 밟아져서 윤식을 자가용에 옮겨 앉혔다. 어제 강용수댁에서 광대를 부렸다는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그는 거의 실신에 가까운 상태였다. 촛점을 잃은 눈이 차창밖에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는데 그런 풍경은 그에게 인식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무명(無明)의 세계에서 생명을 잃은 한물체가 나둥그라져 있는 것만 같았다.
정식은 극도의 긴장감을 가지고 윤식의 모습을 지켜본다. 폭력에 대한 대항이라면 자신이 없는 것도 아니요 우전수에게도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게끔 주의를 주었기 때문에 얼마간 마음을 놓고 있었으나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터져 나올지 그것이 위험했다. 그러나 윤식은 서울에 다 가도록 말한마디 몸짓한번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