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議會(공의회) 精神具現(정신구현)을 위한 刷新(쇄신)의 道程(도정) ⑤
公議會(도정) 前後(전후)의 敎會論(교회론) 本質(본질) 不變(불변)
君主(군주)·民主化(민주화)란 行政體系(행정체계) 指稱(지칭)
對話(대화)의 姿勢(자세)
그전 천주교 요리문답에는 『천주교회는 천주교 신자단체니 예수 친히 세우시고 볼 수 있고 거룩하고 공번된 교회니라』하였다. 이러한 定義는 護敎論的 입장에서 교회를 묘사한 것이다. 이 定義가 오늘에도 틀린 것은 아니지마는 대단히 피상적이요 부족한 것이다. 그다음 구절들은 주로 治敎權에 대한 것과 교회조직이나 구성원에 언급하고 있는데 평신자나 수도자에 관하여는 一言半句도 비치지 않는다. 교회는 성직자 爲主의 교회로 묘사되고 있다.
그 반면에 요새 교회 잡지나 신문 등에는 『교회의 民主化』라는 용어가 자주 나오고 있다. 또 일반이 인식하기에도 천주교회는 오랫만에 현대의 요구를 받아들여서 체질개선을 하느라고 민주화를 부르짖고 어느 정도 민주화되어간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착각이다.
옛날 요리문답의 기본 사상이나 이 소위 民主化主義者들의 기본 사고방식이 조금도 다를 바 없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전자의 생각은 교회를 한개의 조직체로서만 이해하는 것이고 후자의 생각도 교회를 하나의 인간집단으로만 처리하기 때문이다. 다른 점이 있다면 전자는 군주주의적인 교회조직을 생각하고 후자는 민주주의적인 교회조직을 생각하는 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두가지 조류는 다 이번 공의회의 정신과는 거리가 멀다고 보아야한다.
교회헌장은 무엇보다 먼저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비체요 하느님의 백성이요 성신의 궁전임을 강조하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유기체이며, 하느님의 이름으로 성화된 하나의 백성이요 성신이 항상 거처하시는 건물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는 그것이 제도적인 조직체 이전의 생명체임을 이해한다.
교회는 하느님이 인간을 위하여 직접인간역사 안에 간섭해 오시는 것을 구체화시킨 사랑의 성사이다. 달리 말하자면 예수그리스도의 강생 구속의 신비가 교회라는 有形한 표적을 통하여 실현되기 때문에 교회는 하느님의 사랑의 성사라는 것이다.
이렇게 교회를 인식해 볼 때 교회는 단순히 예수님의 교훈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집단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의 徑倫이 구체화된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를 아무리 예수 친히 세우셨다는 大前提를 시인하더라도 그 조직면만 고찰하는 것은 피상적인 관찰이다. 이런 피상적 교회관 때문에 어떤 때는 교회는 군주주의적 조직이라 하고 그것이 현대감각에 맞지 않으니 민주화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교회를 세우실 때에 모든 믿는 자들의 구령의 도구로서 성직제도를 세우셨을 따름이지 정치학적 의미의 군주제도나 민주제도를 도입하지는 아니하였다.
따라서 교회조직이 군주제도냐 민주제도 하는 논의는 공허한 언론에 불과하다.
만일 누가 구태어 그것을 따진다면 교회는 순전히 교회적인 고유한 조직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답변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그 모양 그대로 존속할 것이고 군주화 하거나 민주화 할 수 없는 독특한 생존양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교회의 사무행정이 영구히 변함없는 것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그전에도 말한바와 같이 교회는 그 초월한 진리를 가지고서 인간역사 안에 內在하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인간을 상대로 하자면 시대와 환경에 적응하는 시책을 펴나가야 할 필요성에 부닥친다. 따라서 불변하는 진리위에 교회의 본성이 서있을지라도 구체적인 사목방법이 군주주의시대에는 군주적이라도 좋겠지마는, 민주주의 시대에는 민주화 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러니 현대인임을 자랑하는 사람이라면 어림도 없는 「교회의 민주화」를 주장할 것이 아니라 「교회 행정의 민주화」를 거론해야 될 것이다.
공의회는 이러한 사목 방향을 정치적 냄새가 나는 民主化라는 용어를 쓰지 아니하고 하느님의 백성의 모든 구성원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응분의 참여를 해야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사실상 종래의 사목은 너무나 성직자 중심의 사목이었기에 평신자들의 지위와 책임과 권리가 과소평가 되었던 것이다.
이번 공의회가 가르치는 평신도의 사명론은 결코 신기한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에서 잘 인식되고 실천되던 것을 재인식 재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곳에서 평신도 종속론이나 평신도 해방론은 양극단의 오류임을 지적한 일이 있거니와 공의회는 성직자의 직분과 평신자의 직분을 올바로 인식한다는 전제하에 교회내의 대화를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있다. 대화가 없는 곳에 독선과 의혹이 생기고 비판이 용납되지 아니하는 곳에 부패와 원망이 따르는 법이다.
어떤 論者는 불변하는 진리를 받드는 교회가 너무나 時流에 감기고 있지 아니한지 염려하고 있다. 공의회가 성직의 본질을 해명하고 평신자의 사명을 고취하는 것을 보고 교회도 實用主義를 발휘하여 평신자의 역량을 이용하려 든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런 찰은 그 자체가 功利主義的 사고방식에서 나온다.
초대교회에 내려주신 풍부한 「카리스마」는 오늘에도 다른 형태로 내리고 있으며 그 「카리스마」는 성직자뿐 아니라 많은 평신자들에게도 내리고 있다. 당신 나라의 건설을 위하여 주시는 이 특은들은 그 누구에게 내린 것이든지 다 활용되어야 한다. 교회내의 광범한 대화는 평신자를 이용하는 방법이아니라 교회의 본질적인 구조자체의 정상적인 움직임이요 정당한 발전이다.
교회 안에 있어서 성직자나 평신자의 지위와 책임을 바로 인식하고 각자의 분야에서 교회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대화의 길을 여는 것이 교회쇄신의 또 하나의 방향이다.
<계속>
鄭夏權(解博·馬山중앙본당주임·本社論說委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