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우리는 이런 말을 듣는다. 성당에 다니는 것은 좋은 것이며 나도 원하나 좀 더 있다가 늙어서 여가가 있고 죄를 안지을 수 있을 때 그때 나가겠다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영세신자가 한 두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신자생활이란 과연 무엇을 뜻하는 것일가. 주일날 성당에 나가고 일하지 말고 금요일에 고기 먹지 말고 도둑질 하지 말고 부정한 관계(六계)를 하지 말고 아침 저녁 신공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문답이나 외우면 넉넉한 신자생활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런 것을 다 잘 지키자니 시간도 없고 살기 위해서 이렇게 착하고 조용한 생활만 할 수도 없으니 아직 내게는 적합한 것이 못된다는 것이 아닐까. 또 신자 생활은 천당갈 준비를 하는 생활이니 노인들에게나 맞는 생활이 아닐까 괜히 입교하여 죄만 짓고 구속만 받고 사는 것 보다 아예 죽기전 대세나 받고 직천당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으랴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는 큰 문제가 있다. 인생의 궁극 목적이 천당에 가는 것이라며 과히 틀린 말이라 아니할 것이며 또 천당에 가기 위하여 계명을 지켜야 한다고 하여 옳지 않은 말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곧 사람은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세상에 낫다는 문답의 말과 전연 같은 것을 뜻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해서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福音)에서 사는 신자생활이 이렇게 부정적일 수만 있을가라는 것이다.
신자 생활이란 과연 무엇인가? 신자생활이 만약 주일 미사에 빠지는 대죄를 짓지않기 위해서 우두커니 한시간 동안 聖堂에 서있다가 오면 되고 금요일 고기만 안먹으면 되는 - 교회는 소재를 관면한 것까지 모르고 있어도 - 것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그것이 인간수양을 위해 엄숙한 율법이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하나의 생활의 덧붙임, 고상한 장식품이 아니면 필요없는 무거운 멍에일 수 밖에 없을 것이 아니겠는가,
「나」 전체의 改心(METANOIA) 없이 신자생활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천주님으로 인해 시작되고 천주님으로 향해 나아가고 천주님과 더불어 사는 생활이 신자생활일 것이요 천주님의 사랑으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신 천주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모든 우리들의 죽음을 죽게 하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를 영생에로 이끌어 주시고 그를 따라 천주님의 아들딸이 되게하시고 우리들을 천주님의 아들딸로 살게하신 것을 믿고 알고 사는 생활이 신자생활이 아닌가. 천주님의 구속사업은 이러한 것을 위함이시었고 그리스도가 교회를 세우심도 이러한 것을 위함이었고 교회의 가르침도 이러한 것을 위함이 아니냐. 천주님의 사랑으로 구해진 「나」는 그 큰 사랑을 알고 그 사랑으로 인하여 그 사랑에 답하며 천주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형제를 사랑하고, 사랑하기에 그리스도의 사르침을 따르고 교회의 법을 지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또 그리스도의 가장 큰 계명은 천주님을 사랑하고 남을 자기같이 사랑하라고 하신 것임을 우리는 알지 않느냐. 사도 바오로도 모든 법은 사랑의 계명으로 완성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정신(SPIRIT)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또 모든 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의 계명을 위해서 있고 또 법의 완전한 실천이 사랑인데 껍질이 굳어진 법과 타율적인 속박만 남고 사랑은 왜 힘을 잃었느냐 말이다. 내 육신을 내놓아 불사를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하나도 쓸데가 없도다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신자 생활이란 천당가기 위해 억지로 성당에 오고 지켜야 한다니 겨우 지켜주는 것인가. 아니면 천주의 사랑을 알고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천주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그의 계명을 따르며 살아 천주님 앞의 영복을 얻게되는 생활인가, 다시 말하여 천당가기 위해 천주를 믿느냐 천주를 믿어서 천당에 가느냐, 이 어느것인가를 명백히 해야할 것이다.
李文熙 神父(청주 내덕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