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자의 「에큐메니칼」 운동은 WCC를 위시한 여러 기관사업으로 고정화(固定化) 되었고 일군의 「에큐메닉」 전문가들의 독점사업처럼 되어 버린 감이 없지 않고 한편 교회는 이에 대하여 초연(超然)한채 남아 있게 되었다.
이와같이 하여 근자에 「에큐메니칼」운동은 일종의 정돈상태에 빠져들어 가고 있을때 제2차 바티깐 공의회를 계기로한 가톨릭교회의 등장은 하나의 새 활력을 주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겠다.
더우기 가톨릭교회는 그 강한 조직력을 가지고 전체교회로서 이 운동에 임하게 될 때 형식화되기 쉬운 이 운동에 실질적 내용을 부여하는 계기도 또한 될 것이다. 우리 한국에 있어서의 「에큐메니칼」운동만 볼지라도 각종 프로테스탄 「에큐메니칼」 사업기관들 외국원조 도입되어, 한국교회는 실질상 외면한채 진행되어 왔고, 태반의 교회는 아직도 가입조차 하지 않고 있다.
이런 현황하에 가톨릭편에서 「에큐메니칼」운동의 방향을 모색하고 이 추진을 도모하게 됨은 한국에 있어서의 「에큐메니칼」운동이 하나의 새로운 차원(次元)에 돌입하는 계기가 되리라고 기대된다. 최근에 진행되어 오고 있는 장로교회 양측의 합동운동도 역시 한국에 있어서의 「에큐메니칼」운동의 하나의 새로운 양상을 촉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에큐메니칼」운동은 두 가지 서로 상반되는 조류를 이루고 그러나 한 운동으로 발전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이것은 흩어진 교회들이 하나님 앞에 함께 모이는 운동으로 발전하여왔고 또 한편으로 모인 교회가 흩어져서 세상으로 들어가는 운동으로 전개되어 왔다. 사실 교회의 이 두가지 양상은 가장 본질적 존재양식에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교회는 어디까지나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 나와 영원한 예배를 올리는 교회이며 동시에 교회는 세삼 삶에 있어서 제도의 사회적 경제적 힘에 의지하지 않고, 오로지 신앙의 힘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유일의 무기로 삼고 나가는 순종의 교회가 되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전자는 예배의 갱신운동이 중심에서며 후자는 평신도 운동이 중심에 서게 된다.
또한 전자는 신앙과 직제에 대한 제도적 교회간의 대화가 중요과제로 나타나고 후자에 있어서는 전도와 봉사를 위한 평신도들의 노력과 조직이 중요과제로 나타날 것이다.
WCC 「에큐메니칼」운동은 처음에는 기독론적 신앙 기초 위에 전개되어 왔다. 그러나 헬라正敎의 적극적인 간섭 밑에 1961년에는 드디어 삼위일체론적 신앙기초를 획득하게 되었다. 이것은 다만 교리 적 기초가 더 완비되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는 「에큐메니칼」운동에 있어서 「예배」의 새차원의 중요성이 가미된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따라서 이점에 있어서 이제는 「성령론(성령론)」적 기초를 새로 개척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론」을 현존 교회의 어느 교회 보다 새롭게 정의함으로써 「에큐메니칼」운동의 또 하나의 교리적 기초를 확대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즉 동 공의회에서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정의한 것은 프로메스탄교회에서 희중」(CONGREGATION)이나 「피택자」(ELECTS) 등의 정의 보다 더 교회의 사회성(社會性)을 가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상의 모든 사실들을 종합할 때 「기도」야 말로 모든 「에큐메니칼」운동의 내적 원동력(原動力)이 된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감사」의 기도와 「죄의 고백」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흩어진 교회들이 모이는 운동의 언제나 필요한 원동력이 될 것이다. 기도로써 이루어지는 성령의 교통만이 「예전공참(禮典共參)」의 깊은 차원을 열 것이다. 「간구」의 기도와 『대도(代禱)」의 기도만이 교회와 사회를 있는 참된 줄이 될 것이다. 그리고 「봉헌」의 기도는 흩어져서 사회로 나가는 실제적 발걸음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에 있어서의 「에큐메니칼」운동도 그 원동력인 기도운동으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대화」는 막히기가 쉽다. 그러나 「기도」는 막히는 법이 없다. 사고단위(思考單位)의 장벽들 사이에 「대화」는 그 한계성에 도달할 때 「기도」만이 그 장벽들을 꿰뚫고 「대화」를 종합하며 교통의 안내자가 될 수 있다.
韓哲河(목사 예수교장로회 신학대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