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映画隨感(영화수감)]
人間(인간) 스스로 빚은 歷史(역사)와 文明(문명)앞에 懷疑(회의)
울음·웃음 뒤범벅된 現代人(현대인)의 極限(극한) 表情(표정)
美國社會(미국사회) 苦悶(고민)의 한 斷面(단면) 웨스트사이드 스토리
音樂(음악)·안무·色彩(색채)·촬영 등 映畵技術(영화기술)의 극치
■ 25時(시)
1930年代 유럽歷史는 소용돌이 친다.
히틀러의 「나치」 軍隊는 유태인들을 迫害하면서 隣接의 弱小國家들을 侵略하고 世界에 도전하여 유럽은 戰火에 휩쓸린다. 따라서 루마니아도 「나치」 발굽을 피할 수가 없었다. 平和스럽던 루마니아 農村의 한 善良한 農夫 요한(안소니 퀸분)은 자기아내 수산나(빌나리지분)에게 관심이 많은 그 지방경찰서장의 책략으로 유태인으로 누명을 쓰고 무고하게 강제노동수용소로가 유태인 세 사람과 함께 미국으로 가려고 항가리로 탈출해왔으나 유태인이 아니기 때문에 渡美의 꿈이 挫折된다. 거기서 그는 다시 독일로 끌려가 강제노동을 하다가 뜻하지 않게 그의 생김새가 골수 「게르만」 민족 골격으로 인정받아 「나치」의 친위대가 된다. 그러는 동안 戰勢는 기울어져 독일은 聯合軍에 敗北하고 요한은 연합군의 포로로서 수용생활을 하게 된다. 戰犯으로 몰려 裁判을 받고 3年만에 풀려나온다. 그러는 동안 강제이혼을 한 아내 수산나는 피난 다니다가 독일에서 占領 속련軍에게 강간당하여 어린애까지 얻는다. 그러나 再會의 요한은 어쩔 수 없던 過去때문에 모든걸 용서한다는 것이 『25時』의 대강 줄거리.
여기서 중요한 것은 聯合軍戰犯裁判法廷의 최후 陳述에서 요한이 절규 했듯이 自己가 왜 8年씩이나 끌려 다니면서, 强制勞動에서 부터 「나치」의 親衛隊 聯合軍의 포로 戰犯 등 여러가지 수모와 苦難을 當해야만 했는가하는 理由를 모른다는 것이다.
곧 그것은 요한의 運命인 同時에 列國 사이에서 어쩔수 없이 當해야만 하는 20世紀 弱小民族의 宿命이기도 하다.
8년 동안 요한, 즉 한人間가치나 尊嚴性은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한장의 書類만큼도 認定받지 못한다. 그는 어디에서도 居할 수가 없었다. 그는 存在 自體를 威脅받으면서 밀려 다녀야만 했다. 그것은 곧 現代人의 宿命일지도 모른다. 人間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歷史와 文明 속에서 人間의 居할 곳은 어디냐 하는 問題에 質問하면서 絶望的인 20世紀 中半期의 歐洲 狀況에 「메스」를 加한다. 「나치」 共産主義등 全體主義 國家 勿論 民主主義 國家에 對해서까지도 가차없이 批判을 하면서 歷史의 必然性을 懷疑하고 기계文明과 劃一主義를 告發하면서 轢殺 되어간 人間의 尊嚴性을 부르짖는다. 오늘의 歐洲人(現代人)들은 神에게서 까지도 救援받을 수 없는 25時의 벼랑에 와있다는 것이다. 철조망 속에 갇혀 있다가 철조망에 찢겨 죽는 現代人, 그러면서도 作家는 自由主義國家에 한가닥의 期待를 걸고 人間에게 따뜻한 愛着을 갖는다. 그렇기 때문에 「라스트·씨인」의 요한은 아내 수산나가 소련軍에게 强姦當하여 얻은 아들을 안고 울음과 웃음의 범벅이 되어 어처구니 없는 찡그린 얼굴을 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눈시울을 찡하게 하는 感動을 준다. 콘스탄틴빌질 게을규의 同名의 長篇小說을 영화화한 양지벨누이유 監督은 철처하게 人間의 愛憎에 力點을 두고 絶望的인 狀況에 處해 있는 「렌즈」에 잡았다. 原作小說이 한물갔듯이 2次大戰이 끝난지 20年이 훨씬 넘은 오늘의 관객에게는 그렇게 큰 貨感을 못 준다. 그러나 다시 한번 지난 歷史를 돌이켜보고 되새겨보는 데 좋은 作品임에 틀림없다.
■ 웨스트사이드·스토리
뉴욕의 웨스트사이드衡를 무대로 하여 벌어지는 「틴에이저」 不良輩들의 反目을 그린 뮤지칼. 본토배기들끼리만 모인 제트團과 이민은 스페인계 少年들이 모인 샤크團은 하찮은 支配慾과 憎惡心 때문에 暗鬪를 벌이다가 나중에는 결투를 하여 토배기 제트團의 부두목을 샤크團의 두목이 죽이고 이를 말리던 제트團의 정신적인두목이 샤크團의 두목을 살해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죽은 샤크團의 두목의 여동생은 살인자 제트團 두목과 열렬한 사랑에 빠진 사이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애정은 모든 것을 초월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둘은 뉴욕을 탈출하려고 한다. 그러나 탈출 직전에 제트團의 두목은 샤크團에게 복수당하여 피살된다는 줄거리로 어디에나 흔히 있을 수 있는 素材의 現代版 『로미오와 줄리엣』.
얘기는 家庭과 社會로 부터 疎外되어 있는 十代反抗兒들의 고민과 愛憎과 義理를 펼쳐 놓은 것이지만 그 「틴에이저」들의 行爲속에는 現代美國이 갖고 있는 社會的 고민이 内包되어 있다. 그 「틴에이저」들이 왜 家庭과 社會의 保證圈外로 뛰쳐나가 旣成社會와 成人들을 不信하며 抗拒하는가? 이에는 여러가지 問題가 따른다. 즉 急速한 社會變遷과 機械文明 發達에 따른 모랄의 喪失 個人主義로 因한 家庭의 崩壞와 愛情의 枯渴 고질적인 美國의 人權差別 貧富의 격차 등등 그 「틴에이저」들의 극한적인 生活은 成人들이 다시한번 깊이 생각해야 할 問題點들을 提示해 주고 있다.
전체를 흐르는 감미로운 音樂과 모든 感情을 격정적인 群舞로 表現하는 뛰어난 按舞는 觀客으로 하여금 感動과 흥분의 도가니 속에 말려들지 않을 수 없게 한다. 象徵的인 各種色彩의 이용과 특수촬영 등은 映畵技術의 極致라고 하겠다.
11個部門의 아카데미愛賞을 자랑하는 로버트와 이 監督作品의 映畵는 2時間半을 지루하지 않게 볼수 있는 藝術的 香氣 높은 秀作이라 하겠다.
柳敏榮(劇評論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