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蟋蟀(실솔) (14) 陰地(음지)의 生命(생명)과 陽地(양지)의 化石(화석) ①
발행일1968-01-21 [제602호, 4면]
첫눈이 내렸다. 많이는 아니었지만 희끗 희끗한 눈송이가 전선을 질러서 날라 내리고 마른 가지 위에 쌓이곤 했다.
정식은 코트 깃을 세우고 우산을 펴들었다. 그는 만나자고 한 윤이의 전화에서의 음성이 여니때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까칠하고 날카로운 것 같이 느껴졌다.
(그러려니·생각하니까 그렇겠지)
했으나 뭔지 마음에 걸려드는게 있었다. 거리에 나와서도 묘하게 윤이의 음성이 마음에 걸렸다.
다방에 들어갔을때 윤이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표정은 긴장되어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었어?』
자리에 앉으며 정식이 물었다. 불안이 밀려들었다.
윤이는 아무말 않고 정식을 힐끗 쳐다보더니 카운터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첫눈이야』
머쑥해져서 정식은 창밖의 거리를 내다보며 뇌었다.
『지금 윤식씨는 어느 병원에 있어요?』
윤이는 벼란간 정식의 눈을 똑 바로 보며물었다. 정식은 숨을 마신다.
『저에게 한마디도 말씀 안하시더군요. 하긴 이해 하지만…』
『……』
『세상엔 모르는 일 투성이예요… 하지만 조금씩 조금씩 알아지는 것 같기도 하구요?』
『윤이는 어떻게 그 일을 알았지?』
막혔던 숨을 토해내듯 정식이 물었다.
『M시의 윤식씨가 있었다는 그집 따님하고 내 사촌동생하고 친구간이 었어요』
정식의 얼굴이 하얗게 질린다. 윤식이 발광한 사실 뿐만아니라 그 발광한 광경까지 윤이 귀에 들어간 것에 틀림이 없다고 정식은 생각했다.
『거기 어느 병원이죠?』
윤이는 격한어조로 물었다.
『그거 알아서 뭘해?』
정식은 간신히 말했다.
『지금 저하고 함께 거기 가세요』
어제는 아까보다 더 강했다.
『아니 왜 그러지? 윤이가 왜 그런데로 가나?』
『왜 못가죠?』
『보아서 좋을 것 없어!』
정식은 필지 절망적인 생각에 휩싸여 화를 냈다.
『옷이 더러워질 거라고 거지 옆에 가지말라는 것과 마찬가지군요』
윤이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정식의 양심이 치명적인 상처를 받은듯 그의 얼굴에도 피가 모여들었다.
『전 솔직히 얘기하겠어요. 전 정식씨를 사랑했어요. 지금도 사랑하고 있을 거예요. 하지만 이따금 뭔지 모를 벽을 느끼는 거예요. 그때마다 전 그 벽이 어떤 성질의 것인지 몰랐어요. 한마디로 말해서 그건 광물질 같은 것, 인간성 부족이란말예요』
『그런 폭언이 어디 있어!』
『나 윤식씰 동정하고 있는 거예요.』
『그럴 필요 없어』
『거지에게 동정하는 공주같은 거라 생각하세요?』
『아무튼 등정이란 모욕이야』
『그것도 못가지는 분들이 윤식씨의 육친들 아니예요?』
『윤이가 무슨 권리로 간섭하지?』
『권리는 없을 거예요. 하지만 언어로 통할 수 있는 사람과 사람의 사이라면 상처의 아픔을 공통으로 느낄 수 있는 일 아닐까요? 저는 윤식씨가 발작을 일으키며 저의 이름을 불렀다는 말을 들었을 때 징그럽다고 생각지 않았어요. 미칠만큼 저를 좋아한 남자가 있었다는데 대해 만족을 느끼지도 않았어요. 그것은 비정상인 것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제가 퍼뜩 생각한 것은 정식씨 집안에서 마음의 밑바닥을 헤맨 사람은 윤식씨 혼자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집안에서 윤식씨는 고아였었다는 그거였어요. 너무 똑똑한채 굴지말라 하실진 몰라요. 모두, 모두가 눈에 보이는 것, 가령 집안이라든가 명망이라든가 톤이라든가 혹은 똑똑하다든가 예쁘다든가, 그런 것에만 가치를 두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 모든 혜택을 정식씨는 당연한 것으로 아셨고 윤식씨는 당연하지 않은 것으로 알았을 거예요. 전 지금 누가 어떻게 절 사랑하고 있다는 그런 얘기하고 있는 건 아니예요. 또 반드시 저 때매 윤식씨가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아니예요. 심한 말인지는 몰라도 비인간성 속에서』
『윤!』
『네 말씀하세요』
『우리 사이에 결렬이 왔다면 솔직히 그 말만 해주었음 좋겠
어』
『네?』
『나는 알고 있었어. 윤식의 병때문에 우리사이가 순조롭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어. 그렇게 우희곡절하며 거역을 나타 낼 필요는 없어』
정식의 눈은 분노에 이글거렸고 이마에서는 땀이 배어났다.
『역시 그렇군요. 밖에서서만 얘기할려는군요. 할 수 없어요. 동생의 병을 지신에 대한 피해의 각도에서만 보시는 분이 장차 자기 아내나 애인의 경우에도 그러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요.
물질이나 현상은 얼마든지 왔다갔다 할 수 있지만 어려운건 마음에요.
전 이렇게 터놓고 얘기하면 뭔가 잡힐줄 알았어요. 오늘은 이만 헤어지는게 좋겠어요』
윤이는 핸드백을 들고 일어섰다. 정식은 허탈한 사람처럼 윤이를 올려다 보았다.
『가, 같이 나가』
그는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