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議會(공의회) 精神具現(정신구현)을 위한 刷新(쇄신)의 道程(도정) ⑥
敎會一致(교회일치) 敎理(교리)·倫理(윤리)의 最大公約數(최대공약수)나 皮相的(피상적) 共存(공존) 아니고…全敎派(재일치)
主(주) 세운 敎會(교회)에로 公議會(공의회), 刷新(쇄신)·一致(일치) 위한 것
再一致(재일치) 向(향)하여
요한 교황께서 이번 공의회를 소집하실때에 공의회가 지향하는 원대한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파하였다. 『공의회의 주요한 목적은 가톨릭신앙의 발전과 신자들의 생환의 개선을 촉진하고, 교회의 모든 기관을 현대의 필요와 조건에 적응 시키는데 있다.
이 공의회는 진리와 일치와 사랑의 훌륭한 표현이 될 것이요, 이러한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열렬히 기원하신 일치를 추구하고 발견하도록, 분열된 그리스도교도들을 초대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교황의 이 말씀은 교회자체의 쇄신을 통하여 궁극적으로는 모든 분렬된 그리스도교도들을 하나의 교회로 통일하는데 공의회의 목적이 있음을 뜻한다.
모든 분열된 그리스찬이 하나의 교회를 이루려는 소위 「에꾸메니즘」에 대하여 각자는 我田引水격인 해석과 전망을 내 세우고 있음을 본다.
이번 공의회가 이 문제를 토의하고 있을 때에도, 많은 비가톨릭 인사들은 가톨릭교회가 비가톨릭교회를 흡수하려는 방향에서 논의하고 있지나 않는지 의구심을 가지고 주시하였고, 가톨릭신자들은 교회가 종래 주장하던바 가톨릭만이 유일한 참된 그리스도교라는 입장을 떠나서, 모든 교파들의 연합이나 조합으로의 一致를 모색하지나 않는가 염려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공의회가 반포한 一致運動의 律令은 이러한 양편의 기우를 극복하고 성서적 바탕에서 아전인수가 아닌 일치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공의회의 정신을 이해하는 노력의 일부로서 무엇이 진정한 일치의 길이 아닌지 먼저 살펴보고 나서 참된 일치의 길을 음미해 보기로 한다.
첫째, 재일치의 길은 가톨릭편에서 아무런 변화도 주지 아니하고 타교파를 가톨릭교회에로 불러들이는 방식이 될 수는 없다. 길잃은 양들이 본래의 양우리로 돌아오기를 기다린다는 식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사실상 우리는 과거 9백년 동안이나 헛되게 「울토독스」 교회를 기다렸고 4백년 동안이나 프로테스탄을 기다리고 있었으나 결과는 없었다. 이러한 헛된 호소는 교회분열의 책임을 전적으로 갈라진 형제들에게 지우는 것이기 때문에 비가톨릭 교파에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호소이고 역사적 진리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공정한 역사는 교회분열의 책임이 가톨릭에도 있고 비가톨릭 교도들에게도 있음을 명백히 말하고 있다. 교황께서도 공의회 동안에 여러번 가톨릭교회의 책임을 인정하셨고, 그것에 대하여 공식으로 사과한 일이 있었다.
둘째로, 재일치의 길은 개개인의 改宗으로써 되는 것도 아니다. 9세기 동안 많은 사람들이 가톨릭에로 개종하였고, 때로는 뉴만이나 마리땡 같이 지대한 영향을 미친 개종자들도 있었지만 반대로 적지않은 배교자들도 있었던 것이다.
많은 개종자가 생겼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반가운 일이지만, 여하간에, 아직도 여러 교파들이 재하고 있으며, 또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러니 개개인의 개종을 통한 재일치를 기다린다는 것은 재일치의 포기를 뜻하는 것과 같다.
셋째, 재일치의 길은 가톨릭 신자들의 생활을 표양답게 개선함으로써만 되는 것도 아니다. 열심한 가톨릭 신자들 가운데는 만일 우리가 윤리적으로 진정한 가톨릭신자 노릇을 한다면 재일치는 쉽게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생활의 개선이란 것이 복음정신의 완전한 실현이 아니고, 통속적인 뜻으로 철저한 수계범절만 의미하는 개선일 때에는 그것만 가지고서는 재일치를 바랄 수 없다. 왜냐하면 교회의 분열은 단순히 신자생활의 타락이나 부실에서 유래된 것이 아니라 교리적 심리적 문화적 사회학적 이유들이 얽혀있는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에 지금 신자들의 생활개선만 가지고 이 역사적 사건을 풀기에는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이다.
넷째로, 재일치의 길은 여러 교파들의 주장과 요구를 적당한 외교적 교섭으로 절충하여 단일 노선을 만드는데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바라는 일치는 여러 교파들의 피상적인 共存이아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하는 하나의 복음적 교회이다.
복음적 교회는 현존하는 그리스도교 각파의 교리나 윤리들의 最大公約數가 아니고, 예수께서 계시하신 그대로의 原型敎會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절충식 일치는 진정한 일치가 아니다. 인간이 만든 組合에 불과하다. 따라 어떤 교파라도 좋다는 무관심주의도 불가하고 각 교과의 相異点은 버리고 共通點만 취하여 理想敎會를 세우자는 것도 참된 일치 길이 아니다.
다섯째로, 재일치의 길은 모든 교파들이 분열 이후에 각기 발전시켜온 주의 주장들을 버리고 분열이전의 상태내지는 원시 그리스도교에로 돌아가는 방법도 아니다. 성서에 말하기를,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아서 자라고 자라서 하늘의 새들이 깃들이는 큰나무가 된다고 하셨다. 그렇다면 역사안에 살아있는 교회는 원시그리스도교의 化石이 아니고 발전 성장하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무조건으로 2천년의 역사를 지워버릴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보면, 교리의 어떤 점은 가톨릭 안에서 발전시켰지만, 다른 점은 타교파에서 정상적으로 발전시킨 것도 있기 때문에 분별없이 모든 결과를 부인한다면 인간적인 약점에도 불구하고 또 그 약점을 넘어서 교회안에 활동하시는 성신의 업적을 부인하는 결과가 된다. 따라서 이런 逆轉式방법은 재일치의 길이 아니다. (계속)
鄭夏權(解博·馬山중앙본당주임·本社論說委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