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旬節에 따르는 여러가지 儀式과 節次는 결국 敎會成員의 自己聖化로 그 目的이 옛날에는 敎會에 先行하여 혼자서 聖化할 수 있었다. 個人과 社會가 그렇게 密度가 强하지 않던 어수룩한 時代의 이야기다. 그러나 宇宙時代인 지금 個人이란 말할 수 없이 無力한 存在가 되어버렸다. 아무리 뜻이 멀고 크고 높은들 個人의 힘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個人이란 獨立된 小宇宙가 아니고 큰 「메카니즘」의 微少한 나사못 한 개로 轉落해 보린 것이다.
하늘을 向하여 울부짖어 본다. 땅을 치고 痛哭해 본다. 그러나 空虛한 메아리가 힘없이 울려 퍼질 뿐이다. 이 現代라는 怪物을 우리는 어떻게 克服할 것인가? 이것은 오직 宗敎뿐만 아니라 人間文化 全體에 對한 現代的 悲劇이고 또 苦悶이다. 現代의 知性人은 孤獨하다고 한다. 數百萬의 人波가 都市의 黃昏이 되면 「빌딩」의 후미진 계곡으로 濁流처럼 흘러간다. 그들은 人間이 아니다. 現代的經濟機構라는 「메카니즘」의 한個 초라한 나사못이다. 온종일 勞動에 시달려서 고달픈 神經을 부등켜 안고 休息의 森林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이다.
앞을 보면 아득하다. 그들의 周邊은 赤字와 피로와 空虛로 둘러 싸였다. 來日의 希望은 그들에게서 까마득히 먼 것처럼 보인다. 이 고달픈 人生의 目的과 終着驛은 대체 그 어디메인가?
이먼 怪異한 背景을 등에 걸머지고 現代人은 살아간다. 그래도 그러한 가운데 뜻있는 사람은 眞理를 찾는다. 果敢히 自己聖化를 시도한다. 참으로 눈물겹도록 可賞할 일이다. 그러나 微弱하다. 標的 없는 射擊처럼 努力은 허공을 치고 넘어질 뿐이다. 自己聖化의 길은 現代에 있어서는 標的없는 射擊처럼 空虛感이 자꾸만 뒤를 따른다. 個人이란 너무도 無力해졌다. 그러면 이 課題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번 公議會의 目的은 이런 現代的 苦悶에 대한 聖廳의 施策이 아닌가 한다. 다른 面으로 보아 敎會의 射擊은 標的과 너무도 거리가 멀었다. 現代의 潮流는 옳던 그르던 敎會와는 동떨어져서 흘러가는 傾向에 놓였다. 그러므로 敎會는 現代에 맞추어 한번 姿勢를 바로 잡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거기서 여러가지 대담한 施策이 强行되었다. 四旬節은 우리 敎會 信仰生活의 最絶頂이다. 克己苦行이 따른다. 통회 보속이 따른다. 그러나 그런 어려운 形式의 거의 全部가 撤廢되었다. 그 結果 신앙생활은 참으로 수월해졌다. 現代日常生活에는 아무런 지작을 주지 않는다. 어욱이나 今年에는 두 번 있는 대재나마 한번은 舊曆 正初로 因하여 관면되고 이제 苦難週間의 聖金曜日 한번밖에 남지 않았다. 이밖에도 우리 東洋人으로서는 가슴이 섬찍할 만한 刷新政策이 뒤를 이어 發表되고 있다. 그리고 그런것은 모두가 公議會의 産物이라고 모두 좋게 받아 들인다.
우리나라는 언제든지 새 潮流를 아무런 예비없이 西洋에서 받아들이는 입맛쓴 歷史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東洋과 西洋의 환경의 差異 때문이다. 남의 나라는 벌써 一世紀前에 近代化했거늘 우리나라는 이제와서 近代化운동이 한창이다. 그러나 우리 교회의 현황을 볼 때 우리나라는 아직 近代化의 꿈도 꾸지 않을 때 公議會가 열리고 現代化의 물결이 밀어닥친 것이다.
우리나라 敎會에서 그 누가 일찌기 近代化에 着眼한 사람이 있었는가? 지금이 눈부신 宇宙時代에 있어 우리나라 敎會에는 封建領主時代의 풍습이 그대로 꼴사납게 남아있는 것을 여기저기서 發見하고 뿐만 아니라 그 속에서 코를 싸쥔채 生活한다. 現代에 있어 集團을 떠나서 單獨的 自己聖化는 매우 어렵게 되었다. 가령 누가 童貞을 지킨다고 하자. 그러나 거기 經濟的 背景 없이는 實行이 거의 不可能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 近代化 없는 現代化 作業을 시작하였다. 이건 매우 무리한 이리니 거기에 큰 成果는 바라기 힘들 것이다.
李璇求(가톨릭 靑年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