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월남으로 부터 돌아온지 반년이 지났건만 신문이나 잡지 방송 등에 월남이란 두자가 눈에 띄거나 들리면 신경이 집중된다. 아마 1년 2개월의 체월생활이 지금까지도 내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모양이다.
일요일마다 가톨릭시보를 사보는 것이 즐거움이 되어있는 나는 얼마전에 본지에서(549號 3면 참조) 조그만한 기사 하나를 읽고 감동과 가벼운 흥분을 하고 있었다. 그것은 월남의 「캄란」에 있는 교우 주월기술자들이 「성지회」를 조직하고 있으며 더구나 백마에 계시는 신부님이 미사를 올리기 위해 한달에 한번 오신다는 것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3명이 영세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고향만 떠나도 외롭다고 한다. 더구나 조국을 떠나 이역만리 월남에 가 있으면 여유를 두지 않고 찾아오는 것은 외로움이다.
작열하는 南國의 太陽이 자취를 감추고 서늘한 밤바람과 함께 유난히도 밝은 南國의 별은 영롱한 빛을 낸다. 이별을 보고 있노라면 저도 모르게 「바다의 별』을 읊조리게 된다.
내가 월남에 간것은 작년 2월이다. 「사이곤」에서 사나흘 있다가 「캄란」으로 갔다. 당시는 한국인 기술자는 측량기사 몇명 뿐으로 우리가 차를 타고 지나가면 손을 흔들었고 서로 만나면 기쁨을 참지 못하여 10년지기와 같이 흉허물 없이 얘기를 나누었다.(「캄란」은 동양의 양항으로 아일전쟁당시 일본함대와 현해탄에서 패한 「발틱」함대가 머물었던 곳이다.) 그후 나는 작전지구인 「투이호아」로 갔다.
고국을 떠난지 10여일이 된 것이다. 부대에 도착즉시 군종참모부로 갔다. 군목만 두분 계실뿐 내가 찾는 신부님은 안계셨다. 맹호에 계시는 김신부님이 한달에 한번오신 것이다.
드디어 부활때 신부님이 오셨다. 교우장병들이 천막속에 마련된 성소로 모여들어 전원 고해성사를 봤다. 나는 그때 풍금을 쳤다. 미사때 성가 반주 한번도 해 본일이 없는 내가 그것도 대첨례미사에 친것은 내생애에 처음이며 끝일 것이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얼굴이 붉어진다. 「루이호아」 市內에는 비교적 큰 성당이 있다. 사십일 때 성당에 가면 성로신공을 하는데 말만다를 뿐「계나응」의 語調가 어쩌면 우리와 흡사한지 동양인의 哀調를 엿볼 수 있다. 내가 처음 만나뵌 월남인신부는 며칠전 베트콩지역에서 피난 나오신 노신부님이다. 심신이 피곤한 모습이 한눈에 알 수 있다. 내가 태극선을 하나 드렸더니 몇번이나 고맙다고 말씀하시었다. 나는 위로의 말을 드리려 고 해도 불어만 아신다는 이 신부님 하고는 도저히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7월엔 「사이곤」으로 배속되어 「투이호아」를 떠났다. 「사이곤」의 중앙성당은 1880년에 건립되었는데 종각이 둘이다.
중앙성당에서는 일요일 낮 12시에 영어 미사가 있다. MACJ(주월미군사령부)에서 발행한 안내서를 받아보니 「사이곤」 시내에서 미사를 볼수 있는 곳을 명기하고 있어 신앙생활에 불편을 덜어주고 있다. 부러운 일이었다.
그후 본국에 있는 아는 신부님의 편지로 우리말을 할수 있는 신부님을 알게 되었다.
「뚜송」에 있는 「평화의 모후 성당에 계시는 이 신부님은 한국에 오래계셨으며 NC 특파원인 표신부님이다.
나는 그후 우리말 미사를 들이기 위해 교우를 규합하다가 귀국했는데 나의 경험에 비추어 한가지 제언할 것이 있다. 이것은 또 30餘年간의 나의 수수께기 이기도 하다. 왜 우리 천주교신자는 소극적인가 하는 문제다. 그리고 내가 교우다 하는 것을 나타내질 않는다.
나는 끝으로 「캄란」에 조직된 「성지회」와 같은 모임이 더 많이 조직되어 교우상호간의 신심과 친목은 물론 외로움에 지쳐 향락에 방황하는 비신자를 구령하고 나아가 교우가 많은 월남인들에게도 좋은 표양이 되어 전쟁의 불우한 환경에서 허덕이는 이들에게도 주의 영원한 행복이 항상 가까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겨자씨가 되어질 것을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외로운 파월맹호입니다. 양부 보나 형제가 되어 주실분을 찾습니다. 맹호공병대대 제1중대 하사 이기한
宋允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