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蟋蟀(실솔) (15) 陰地(음지)의 生命(생명)과 陽地(양지)의 化石(화석) ②
발행일1968-01-28 [제603호, 4면]
다른 때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온 김일우 사장은 밤송이처럼 몸을 감은 외투를 후딱 벗어던지고 자리에 앉았다.
『정식이 들어왔소?』
『들어왔나 봐요』
옥여사가 대꾸한다.
이런 날은 의례히 세사람이 함께 식탁앞에 앉는다.
『거 집구석이 뒤숭숭하니 바깥일도 자꾸 꼬여 들어가는군. 빌어먹을! 재수가 없을 라니까』
투덜거리는 소리를 잠잫고 듣고 있던 옥여사는 봉애를 부른다. 봉애는 핼쑥해진 얼굴로 나타났다.
『너 요즘 어디 아프냐?』
김일우 사장이 물었다.
『아뇨』
봉애를 불러 놓고 멍해있던 옥여사는
『참 저녁 준비 빨리하도록 그리고 되거들랑 이층아저씨도 오라고해』
『네』
봉애가 나가자
『그애 왜 그모양이 됐어? 이상한데? 꼴이 말이아냐? 봐서 내보내도록 하지』
김일우씨가 말했으나 옥여사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세식구가 식탁에 모여 앉았을 때
『오늘 김박사한테서 전화가 왔더군』
하고 김일우씨가 말을 끄내었다. 옥여사, 정식은 다같이 침묵을 지킨다.
『정식이 너 병원에 갔었었나?』
『최근에는 못가 봤읍니다』
정식은 딱딱짜르듯 부친에게 대답했다.
『어지간히 좋아진 모양인데 어디 정양할만한곳에 보내는게 어떻겠느냐 하더군. 정식이는 어떻게 생각하나』
『김박사 말씀대로 하시는게 좋겠읍니다』
『그래 안양에 있는 농장에 보내면 어떨까 싶어』
『그러시죠』
『아뭏든 골치야. 그런데 까지 신경을 쓸려…』
김일우씨는 남의 일처럼 짜증을 부렸다.
『그건 그렇고 너 이명근 사장의 일을 맡았다면?』
김일우씨 입에서 말이 떨어지는 순간 옥여사의 얼굴이 파아랗게 질린다.
『일이래야 뭐, 미국 가 있는 따님집을 설계해 달라는 거죠』
『잘해봐. 어제 모임이 있어서, 그 자리에 이영근 사장이 나왔더군. 서로 이름은 잘알고 있으면서 처음으로 소갤 받았지. 나같이 막굴러 먹은 사람하곤 달라서 아주 점잔하고 착실해 보여』
김일우씨는 정직한 말을 했다.
『깨끗한 노신사 더구먼요』
『음, 앞으로 내 사업을 위해서도 이사장하고 친분을 맺어둘 필요가 있어 아무쪼록 마음에 들도록 일을 해보는 거다』
부자가 말을 주고받는 동안 맹목적으로 밥을 떠넣는 옥여사의 손길은 몹시 떨고 있었다. 그러나 두사람은 옥여사의 그 심한 태도의 변화를 모르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런 저런 이야기, 정식이 명년에는 미국에 가야겠다는 이야기며 혼인문제에 이르기까지, 다만 혼인 이야기가 났을때 만은 정식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만하면 괜찮을 게다. 결혼해서 함께 미국으로 가든지, 아뭏든 생각해서 알아 하기로 하고』
김일우씨는 일단 말을 끝맺았다.
정식이 자리를 뜨고 난뒤
『당신도 요즘 어디 아퍼?』
잇발을 쑤시다가 김일우씨는 옥여사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뇨.』
김일우씨는 씩 웃었다. 그 웃음은 참으로 이상 야롯한 것이었다. 옥여사는 오시시 떨었다.
공포와 저주의 빛이 눈동자를 한바퀴 도는 듯 했으나 이번에는 소리를 죽이며 끼둑끼둑 웃는 김일우씨 웃음에 옥여사는 태연하고 무관심한 상태로 돌아간다. 이러한 이상한 분위기는 어제 오늘에 시작된 것은 아닌 듯 했다. 벌써 오래 오랜 옛날부터 서로가 익혀온 적의와 싸움의 형태인 듯 했다.
페인이 되어 병원에 있는 윤식에 대하여 김일우씨는 어떤 슬픔을 가졌는지 옥여사 또한 어떤 괴로움을 가졌는지 그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표면상으로 볼것 같으면 그렇게 비정한 부모가 과연 존재 할 수 있을 것인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밤은 깊어가고 창 밖에는 눈이 자꾸만 쌍이고 있었다. 멀리서 둔중한 음향들이 울려오는가 하면 잠든 김일우씨의 코고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옥여사는 돌아누으며 어둠을 뚫어본다.
(유령의 일생 그림자의 일생 나는 다만 생존을 위해서만 이 모든 것을 참고 견디었던가…)
어둠을 뚫어보는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진다.
(내가 울고 있다. 내 눈에 눈물이 남아있었던가 내가 지금 울고 있다. 몇 십년동안 내 눈에서 눈물이 흐른 일이 없었다.)
옥여사는 벼게 위에 얼굴을 파묻는다.
(불쌍한 윤식이… 내 아들… 그 애는 광명을 찾으려고 몸부림을 쳤다. 허수아비 같은 정식은 아아 그 애도 불쌍한 아이였어. 바늘방석의 아픔을 그 애는 모르고 왔지. 꿈에도 모르고 왔지. 그는 김일우씨를 존경하고 애정을 가지고 대했다.
그 애는 김일우씨가 펴는 달콤한 거미줄에 걸린 한마리의 나비… 사실을 밝혀야지, 사실을 더 이상 나는 무엇을 바라고 생명을 연장하는 것일까…)
이튿날 옥여사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감기가 들었다면서 그는 방안에 사람도 못 들어오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