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채워지지 않고 가라앉지 않은 마음으로지만 귀가 멍해지는 소음 속에서 지금 잠시 완전히 정지된 內面의 時間을 가져봅니다.
봉재시기 40일간! 다행히도 앞으로 1주간 남김을 갖고 있는 우리는 참담한 후회를 하기보단 장미빛 부활을 맞이할 마음의 준비에 바빠야 되지 않을까요?
하늘의 뜻을 받아 철저하고 싶은 의지 완성에 달하고픈 의지로 긴장 속에서 生活하고 있는 영혼들, 어떤 순간에라도 정신의 비약을 느끼며 분별과 思慮와 결단으로 매순간을 이루어 나가는 영혼들은 때를 놓칠새라 기다리다.
이루고 끝맺는 이 유일의 봉재시기는 해마다 오고 있지만 나머지 영혼들에겐 봉재의 의미는 변하고 있고 배한가지로 그저 지나는 날들에 불과한 것이 아닐런지요. 봉재시기! 이는 그리스도의 더할 수 없는 수난을 묵상하며 적으나마 한오라기만큼이라도 보상을 해야하는 시기라고 말할 수 있을겁니다. 허나 우리 속에 있는 빙하- 이기, 교만이 수시로 꿈틀거리고 육신의 나태와 허영이 머리를 들면 앞이 아연해지다가도 곧 만성면역으로 넘겨지고 마는 것입니다. 절제 없는 애착일랑 연속적으로 끊어버려야겠는데 말입니다.
지나가는 것은 모든 것이 허무한 것 - 허나 단지 허무함만으로 끝내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며 보람일 것입니다.
지금 깜짝깜짝 놀라도록 깜찍했던 소화 데레사의 영혼이 생각나는군요.
『외롭고 서글픈 생각이 드는 때는 아버지가 일러주신 아름다운 詩 한절을 거듭 읊으며 위로를 받았읍니다.「인생은 네 집이 아니라 네 작은 배다」』
그래요 배는 물위에서 항상 움직여야 하고 목적지를 향해 방향을 잘 잡아야 하며 가다간 심한 풍랑도 만날 것이고 혹 때론 순풍 속에서 항해 할 때도 있을 거에요. 풍랑을 두려워 하고 꺼려하고 마다하는 선원은 목적지엔 결코 닿지 못할 것입니다. 그 배는 꼭 그러한 물위를 거쳐야만 할 테니까요. 그리스도께서 또한 시몬에게 말씀하셨던 것이 생각납니다. 『시몬! 깊은데로 가서 고기잡기로 그물을 치라』
깊은 곳엔 가긴 힘드나 가야하고 갈만한 곳인가봐요. 구리도 그 깊은 속에 들어가 불멸의 보화를 퍼내야 되지 않겠읍니까? 참말 人生은 흘러만 가선 안되고 성실로서 내용을 이루어 가는 것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도 하루 하루를 보내는 것이 아니고 하루하루를 내가 가질 무엇으로 채워가는 것이라야 하지 않겠읍니까? 그러기 위해선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일에 완전히 만족할 수 있는 용기가 요구되지 않겠읍니까? 이것은 완전히 정신의 안정을 가짐이 필요한 것이고 이와같은 덕은 그리스도의 완전하심과 위대성, 인내력을 깨달아 배우면 배울수록 더 쉽게 쌓아질 것입니다.
그런데 깨달아 배우는 것이 이렇게 어려울 줄이야.
누구나 복락의 맛을 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먼 곳에 있는 줄로 알고 있고요. 그러나 그 복락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이 땅에서 복락의 맛을 못본 사람은 복락의 「티켇」도 없을 것입니다. 그 맛을 - (단 한번이라도 그 眞價의 맛을) 봐야만 고통도 참는 힘이 생겨 그 맛을 애절히 그리워 하며 고통중에서도 평화를 누릴 것입니다.
人間은 자기의 가치관에 따라 生活해 나갑니다.
가치관이 광석에 있을 때 땅속에는 그것에 눈을 돌리고 찾듯 우리의 가치관이 사랑일 때 우리는 그것을 찾는데 눈을 돌림에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보여준 이 봉재시기에 가치기준이란 무엇일까요? 수직적인 당신(神)과 나와의 교환에 치중하고 횡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 부족과 자신의 잘못을 기워 갚음이 아닐까요?
『마음은 원하되 육신은 약하며…』 성 바오로는 이미 이렇게 우리의 약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허나 항상 사소한 일에 나 자신과 겨누는 좀 심히 말해서 투쟁하는 자세로 있어야 되겠읍니다.
40일을 온갖 고통 기아 속에 계셔야만 하셨던 그분은 모든 것을 - 하물며 생명까지도 우리를 위해 바치시고도 그것을 아무것오 아닌 것으로 여기시는 사랑의 극치이신 그분은 오늘도 우리가 떠맡기는 십자가에 못박히시며 당신의 인자하신 손을 벌리시는데 우리는 과연 한손으로는 일하고 한손으로는 그분과 결합하는 것을 방해하는 자잔한 일들을 우리 영혼에서 멀리 흩어버리고 있는 것인지요.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일가요. 하지 않는 것일까요? 「다시는 결코 아니하련다」 이러한 결심은 때대로 누구에게나 여러번 마음에 자리 잡을 것입니다.
부르시는 분은 목자, 우리는 양! 특히 헛되이 보낸 날들을 생각하며 남은 봉재기간동안 목자가 주시는 성총의 먹이를 먹으면서 그분의 사랑도(고통) 달게 많이 많이 먹으면서 그 어미의 음성을 따라가듯 그분의 얼굴을 찾아보려고 애써야만 되리라 생각됩니다.
때론 보이지 않을 것이나 그분은 우리가 애쓰는 것만으로도 만족하시고 계실겁니다. 産苦 끝에 맺은 열매를 보고 보람과 悅樂을 느끼듯 우리도 언젠가는 그 기쁨을 완전히 맛보게 될 것이 아니겠어요?
지금! 우리 앞에는 무한대한 대리석이 놓여 있읍니다. 이 대리석을 얼마만큼 깨뜨려 어떤 예술품을 만드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自由意志요 선택인 것입니다.
「雨寶益生 滿虛空, 衆生隨器 得資量」 佛典에 이러한 말이 있읍니다. 보배는 비오듯 쏟아지고 있으나 중생은 그릇의 크고 작음에 따라 축복을 받을 뿐이란 뜻입니다.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요. 그 귀한 보배를 우리에게도 그분은 주시고 계십니다. 우리의 그릇을 넓히기 위해 의식을 매 순간마다 지키며 깨어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우리에게 적합하고 당연하며 아른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生의 과제일 것입니다.
우리 모두 갑시다. 어디로 가도 나를 제외할 수 없는 커다란 힘 앞으로 - 그 속에서 우리는 自存의 모습을 잡을 것이모 신의 모봐와 은총 아래 거할 수 있는 사랑의 - 정의의 비상을 간직할 수 있을겁니다.
<끝>
金愛子(大學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