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엣세이] 「생명 사랑함은 곧 하느님 사랑함」
苦痛(고통) 속의 人類(인류) 꽃같이 아름답고
바스카 어린양이 죽어 復活(부활)하니
「神(신)은 죽었다」는 人類(인류)의 절규
그를 감춘 그리스도 信者(신자)가 받을 추궁
『가장 곤란하나 가장 본질적인 것은 - 생명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고통을 당하는 때에도 이를 사랑하는 것이다. - 생명은 모든 것이기에. 생명은 하느님이요 생명을 사랑함은 하느님을 사랄함이라』고 톨스토이는 선언하였읍니다. (전쟁과 평화)
우리시대처럼 사람의 생명이 초개같이 짓밟히는 때도 없었으려니와, 그 존엄성을 캐내려고 몸부림 치는 때도 없었을 것입니다. 생명은 하느님이요 생명을 사랑함은 하느님을 사랑함이라는데 『신은 이미 죽었다』고 니체가 말했는가 하면, 수삼년 이래, 그것도 「바티깐」에서는 교회의 내연작용(內燃作用)이 모르익어갈 무렵 『신은 죽었다는가?』하는 말이 거리에까지 돌고있읍니다. 이러한 말이 무신론자들의 입에서 나왔다면 모르되, 신학자들(急進神學)이 일부러 퍼뜨리고 있는 듯하니, 그리스도를 믿는이건, 안믿는이건 간에, 이에 자못 궁금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읍니다.
과연 하느님이 죽었다면, 자살하였는가? 타살되었는가? 『나는 <내가 있노라>(야훼)하는 이로다』(EGO SUMQUISUM)(출애급 3 · 14)고 그 이름을 드러낸 하느님 자신이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면, 모든 일은 끝난 것입니다. 하느님을 죽인 죄(SEICIDE)란 말도 아니된다 하여, 2천년래의 누명을 유태민족이 지난번 공의회에서 벗게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교와의 관계에 대한 선언문 참조).
자살도 아니요, 타살도 아니라면 『하느님이 죽었는가?』하고 묻지말고 차라리 신자한테서 이미 하느님의 모습을 찾을 수 없으니, 하느님을 죽인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신자들이요 - 그러니, 하느님을 살려놓으시요 - 하고 똑바로 일러주는 것이 서로 편할상 싶습니다. 도대체 신의 부재를 부르짖는 무신론 자체도, 교회에 신빈정신(神貧精神)이 결핍되고, 보편성(CATHOLICIT)이 아쉽고, 현대과학, 철학시술(신학면에 있어서도)에 뒤떨어져 있으면서도, 따라가려고 하지 않는데 대한 불만 및 항의에 싹트고 있었음을 볼 때, 이에대한 책임은 누가 져야 되겠읍니까(사목헌장 19 참조).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죽기 위하여서기 보다는, 인류와 함께 부활하기 위함이었고, 서로 미워하는 인간에게 사랑을 불어넣기 위함이었읍니다. 그러므로 구세사업이 제십사처로 끝난 것이 아니요 제십오처에서 시작되는 것이기에, 사도 바오로는 『만일 그리스도 부활하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 설교도 너의 신앙도 헛되다』고 단언한 것이 아니겠읍니까.
지난간 것도 아릅답다.
이 지음 문둥이도 아름답다.
또 오려는 문드러짐도 아름답다.
모두가 꽃같이 아름답고…
꽃같이 서러워라.
이는 한하운의(韓何雲) 영가(靈歌) 「생명의노래」의 일부입니다. 인류가 그 썩어져 가는 자신을 드러다 보면서 기쁨과 사랑을 주는 생명을 찾으면서도, 붙잡지 못하는 안타까운 심정이 엿보이는 듯 합니다.
『우리의 죽음을 당신이 죽으심으로써 소멸하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얻어주신 빠스카의 어린양』(부활감사절)이여, 우리에게 부활의 기쁨을 주소서. 알렐루야.
한공렬 主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