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文學(문학)과 問題意識(문제의식) 제3회
永罰罪(영벌죄), 天主慈悲(천주자비)에 對峙(대치)시켜
罪(죄)의 深淵(심연)서 더욱 神(신)을 절규하는 人間像(인간상)
自滅決行(자멸결행)하기까지 궁극에 몰리는 人間狀況(인간상황)
지옥갈 最後(최후)의 一人(일인)조차 포기않는 博愛意識(박애의식) 追求(추구)
내가 소년시절 고향 덕원(德源) 분도수도회 소속 신학교에서 일어난 일이다. 거기 교수로 목신부(牧神父 · 獨逸人)라는 신학박사가 계셨는데 그분은 어느때 강의중에 신의 자비(慈悲)와 영벌(永罰)은 양립(兩立)할 수 없다고 토로(吐露)하고 보따리를 싼 일이었다.
쉽게말하면 그는 무한이 인자하신 천주는, 사람이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지옥이라는 영원한 징벌을 스스로 내리지 못할 것이라는 뜻이다.
당시 나의 소년의 머리로서는 공감이라기 보다 학자의 양심이 갖는 용기와 그로말미암아 당하는 자기희생(수도원에서 추방됨)에 동정같은 것을 느꼈다.
그런데 실은 이 문제가 어떠면 가톨릭문학자들의 특히 소설가들의 최대의 고민이기도 하다. 즉 작가들은 자기 스스로가 작품 속에서 인물을 창조함으로써 조물주의 애정을 몸소 체험(?)하고 그 애정으로 인하여 자기가 창조한 인물들이 최소한 구령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실예(實例) 하나를 들춰보자. 우리나라에도 「제3의 사나이」 「사랑의 종말(愛終)」 「조용한 미국인」 등 영화나 번역으로 널리 알려진 영국의 현존작가 그레암 그린의 「사물의 핵심(事物의 核心 - 번역 있음)」을 보면 『주인공 스코비는 서부 아프리카 어느 받닷가 소읍 경찰서 부서장이었다. 그런데 부인 루이즈가 전지요양(轉地療養)을 간 사이 조난선(遭難船)에서 자기가 구출해온 젊은 헬렌에게 연민(憐憫)에서 간호를 하다가 끝내는 그 고독한 여인과 애정(姦淫을 意味함)에 빠진다. 그러나 부인이 돌아오게 되자 그는 차마 부인을 배반할 수가 없어 모령성체(冒領聖體)를 하면서까지 부인을 속이고 또 한편 의지할 곳 없는 애인 헬렌도 버릴 수가 없어 마침내는 선의(善意)만의 약함 때문에 자살을 하고 만다』는 줄거리다.
그 스코비는 죽기전 『나는 살아있는 한 그녀들 중 누구를 버릴 수 없다. 그러나 내가 죽음으로써 그들의 피속에서 나 자신을 멀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독백하고 이어서 『천주여! 나는 이 이상 당신을 모욕할 수가 없읍니다. 당신도 나를 영원히 잊으시면 훨씬 편하시겠지요. 내가 당신의 손이 닿지 않는 곳(地獄 筆者註)에 가고 나며 당신은 평화를 얻으시겠지요』라고 절규한다.
그 애절함이야 어떻든 간통을 범하고 고해도 안하고 모령성체를 하고 자살이라는 신학적으로 제일 큰 실망의 죄를 범한 그가 구령되었다고는 보통 교리(敎理)의 세계에서는 생각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그 소설은 막음 대목에서 랑크라는 신부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하면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렇듯 잘못을 저지른 사람(스코비)이지만 나는 어쩐지 저 사람이 진정으로 천주를 사랑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라고 술회시킨다.
이로 인하여 금세기(今世紀) 가톨릭 문학의 유명한 논쟁이 일어났으니 즉 『스코비는 영벌을 받았겠는가』라는 시비가 바로 그것이다. 이 사건에 대하여 베르지움의 샤르르 뮤레 신부를 비롯한 신학자들은 대체적으로 『그것은 좋건 굳건 천주가 각자 운명에 가지고 계신 섭리에 부당히 간섭하는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고 프랑소아 모리약을 비롯한 가톨릭 문학자들은 『저 피눈물나는 고통 속에 자기의 멸망마저 결행한 그의 사후(死後)에 천주께서 안식(安息)을 주실 것을 바라는 것이 왜 나쁘냐(이상 두 괄호내 大意要約은 필자)』고 이를 변호하고 있다.
한편 얘기는 좀 비약하지만 가톨릭문학의 현대의식을 추구한 또 하나의 효장(효將) 샤르르 메기도 그 작품 속 주인공을 통해 『주여! 지옥에 떨어지는 영혼이 단 하나라도 남을 때까지는 오히려 그를 대신하여 나에게 형벌을 주소서』하고 갈원(渴願)을 발하게 한다. 우리 동양 불교의 지장보살(地藏菩薩)이 『모든 중생(衆生)이 성불(成佛)할 때까지 지옥에 떨어져 있겠다』고 발원(發願)한 것을 상기시킨다. 아니할 말로 저러한 타애(他愛)의 발원이 없이 박애(博愛)에 철(徹)할 수 있으며 착한 목자가 될 수 있을까. 또한 이것은 내 독단(獨斷)이지만 우리 교회가 앞으로 타 종교(특히 불교)와의 대화에 있어 최대의 장벽은 이 영벌문제라고 본다.
여기서 내가 생각나는 것은 1963년 6월 3일 이땅의 구도자적(求道者的) 시인이셨던 공초 오상순(空超 吳相淳) 선생이 별세하셨을 때 나는 그 제자로서 추도문을 쓰게되었다.
그런데 선생은 대체적으로 불교로써 그의 생애와 사상을 완성하신 분으로 가톨릭인 나와는 대차적인 신공(信工) 속에 사신 분으로 그 사후의 영생을 축원하는데 있어서 나는 가부리엘 마르셀의 알베르 까뮤에 향한 추도문을 인용하여 『저렇듯 인간으로 더할 바 없는 무신자(無神者)의 진실이 사후에 영관을 가져오리라고 가톨릭인 내가 왜 밎지 않겠느냐』고 쓰고 천주의 영광 속에 깃들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물론 이것은 내가 오늘날 가톨릭의 세계적인 사상가인 위력(威力?)을 빌렸다고는 하나, 신념을 가지고 표백한 것이요 한국에서 기독교인이 무신론자의 영생(永生)을 공표한 그 효시라 할 것이다. (계속)
■ 筆者의 詩 - 나는 아직도
나는 아직도
하늘에서 땅에서
또 사람에게서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노라.
보지도 못했노라.
내 가슴 안에서 피고 사라진
億萬의 億萬 사연을
단 한마디 내지도 못했노라.
具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