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釜山地區(부산지구) 제2次(차) 學聯代議員大會(학련대의원대회) 講演抄(강연초)] 殉敎者(순교자)와 한국교회
福音(복음)으로 새로운 세계관에 눈떠
人類史上(인류사상) 드문 自發的(자발적) 敎會(교회) 設立(설립)
初代(초대) 周(주) 神父(신부) 代身(대신) 殉敎(순교)한 평신도 있고
그 영향 - 門戶開放(문호개방) · 敎育(교육) · 科學(과학)으로 近代化(근대화) 등 至大(지대)
교회역사를 통해 보면 새로운 전교지로 갈때는 박해를 당하는데 박해의 원인은 인간의 기본적인 정의를 실천하는 교회사상과 그 지방의 군주나 황제의 신격화한 독재화에 의한 것이었다.
1. 槪觀
그리스도의 사상이 로마 제국으로부터 「게루만」 족과 전유럽을 통하여 동양에까지 파급되어 중국과 일본이 2백여년동안의 박해를 받으며 오늘에 있기까지 훌륭한 교회를 세웠고 우리나라도 전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특징있는 교회를 우리의 손으로 키워 온 것이다.
한국교회는 「마테오 리치」 신부가 쓴 「萬國與圖」에 의해 처음으로 한국의 위치와 세계를 보는 눈을 뜨게 되었고 비로소 세계는 둥글고 넓다는 것을 알고 새로운 우주관을 싹트게 했으며 중국의 모든 종교(불교, 유교, 천주교)의 교리설명과 종교를 비교설명한 「천주실의」를 통하여 우리나라 사람들은 새로운 교회에 대한 인식과 많은 감화를 받았던 것이다. 당시 우리나라 사색당파의 南人派에 의하여 많이 읽혀지고 연구되어 李磎光(芝峰)씨가 처음으로 「지봉유설」을 써서 천주교회를 소개하여 학계에 많은 영향을 주어 남인 「실학운동」이 일어났다. 또한 李翼(星湖)과 그의 제자 安鼎福이 「천주교리 대담」을 썼고 丁약용과 李承薰(베두루)이 신앙운동이 경기도 광주땅 走魚寺 천진암에서 전개되어 1783년 북경에서(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그라몬트」 신부에 의해 영세를 받아 본명을 「주춧돌」이란 뜻으로 「베드루」라 지었다. 그 이듬해 정다산 형제가 영세를 받고 중국인 金範禹씨 집에 모여 한달에 4번씩 주일을 지키고 자발적인 교회를 세우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세워진 교회는 1785년에 시작하여 1866년 한불통상조약이 맺어지기까지 약 102년동안 4번 큰 박해를 받게된다.
2. 박해
1785년 김범우 집에 숨어서 신앙생활을 해오다 발각되어 모두 잡혀가고 모든 유품은 압수되었으나 正祖의 너그러우신 이해로 모두 풀려나오고 김씨만 집을 빌려줬다는 죄목으로 고문을 당하여 순교했으나 1779년부터는 북경의 사신에 의해 성직의 범례가 있음을 알고 신부를 청하여 1794년 2월에 周文謨 신부가 최초로 입국하여 1795년 1월까지 많은 신자들이 늘어갔다. 당시 1791년에 전라도 珍山에서 다산의 외삼촌 尹持忠씨가 신주를 모시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순교했는데(珍山事件) 천주교 신자들은 조상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표면상의 박해 원인이 되었다. 조정에서는 정치적인 보복으로 南人派를 몰아내는 당파싸움이 일게되고 주 신부 체포령이 내리자 崔仁吉(마지아)씨가 주 신부를 가장하과 잡혀들어 가서 순교한다.
아깝게도 正祖가 승하하고 貞純王后가 실권을 잡자 1762년에 「사도세자」를 쥐독안에 넣어서 죽였다는 사실을 가지고 僻派와 時派간의 정치적 대립이 격심해졌다. (이것이 내면상의 원인) 이렇게 하여 1801년(辛酉) 제1차 박해가 시작되어 주 신부를 비롯한 3백여명의 신자가 순교한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은 박해가 심할수록 용기를 얻었고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의 씨가 되었던 것이다. 그후 왕실에까지 전파되어 정조의 배다른 형제 彦思君과 宋씨부인 申씨부인이 예수를 믿어 그후 사약을 받고 순교했다.
1831년 丁夏祥씨가 박해를 받으면서 북경을 12번이나 왕래하여 한국교구 설정을 요청하여 초대교구장으로서 주교가 임명되나 결국 들어오지 못하고 만주땅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그후 다시 한 분의 주교와 두 신부가 한국에 들어와 한국교구는 북경에서 정식으로 분리되었다.
1839년 안동김씨 純元王后(천주교회를 이해했음) 세력을 꺾기위한 싸움이 벌어져 乙亥년에 박해를 당하는데 해외로 유학간 신학생 가족과 많은 신자가 순교당한다. 그후 1846년에 (丙午)박해가 있어 金大建 신부가 순교했다.
1849년 哲宗이 등극하자 천주교회는 크게 발전했으나 1863년 哲宗이 죽고 高宗이 실권하자 「로서아」와 북경으로부터 조약을 맺고 우리나라에 항구를 개설하려는 것을 당시 승지 南鍾三(요왕)이 불란서와 문호를 개방할 것을 건의했다가 북경에 갔던 僻派 사신의 모략에 의해 1866년 병인년 대박해를 당한다. 9분의 신부와 남종삼 외 많은 신자가 순교하고 1887년 드디어 한불통상조약으로 한국의 교회는 다시 햇빛을 보게되었다.
3. 영향
1, 참된 신앙을 확립 2, 온갖 미신의 타파 3, 양반 쌍놈의 계급타파로 평등과 민주적 사상을 보급 4, 각종 조약으로 문호가 개방 5, 서양과학 의학 건축 인쇄술 그리고 교육제도를 발달시켰다 6, 교회 혼배법으로 1부다처주의가 배격되고 사회정의가 실천되었다 7, 고아원 양로원 등으로 사회사업이 개설되고 8, 교회책을 한글전용으로 하여 조국을 해외로 많이 소개하여 애국정신을 고취시켰다고 할 수 있다.
柳洪烈(大邱大學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