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然에 合致하는 모든 것은 善으로 여겨야한다』는 치체로의 말을 새겨본다. 옳은 말이지, 있는 것이야 다善이 아닌가. 그리고 제각기 자기대로의 存在召命에 참여하고 있으니까.
그러면 德을 닦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自然的인것을 疎外하는데 있을까? 德이 어떤 典型에의 同一化에 있다기 보다 자기에게 소여되어 있는 독특한 그리스도의 一面을 구현시키는데 있다면, 자연적인 것을 啓發하는데 있다고 해야 옳지 않을까? 있는 모든 것이 理智와 意志의 對象이될 수 있기에 善이라는 「스콜라스틱」한 論證을 구태여 빌리지 않아도 결국 모든 자연이 우리의 最終目的에 志向되어 있다는 것을 쉽게 感得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떤날 필자는 어떤 수녀님을 뵈오러 수녀원에 간적이 있었다. 수녀님을 기다리고 있는 동안 옆에서 들리는 대화에 귀가 기울어졌다. 어떤 연세 많은 수녀님 한분이 젊은 수녀님께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셨다. 『수녀, 수녀는 아직 젊은데 퍽 조심해야 된다고 생각해. 나는 고모(姑母)가 돌아가시게 됐다고들 하는데 외면하고 있으니까. 우리로서는 부모도 다 끊어버렸는데 친척이 다 무어야 기구나 되지, 기구』
기구의 본질이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이 아닐가? 또한 이 사랑이야말로 가브리엘·마르셀의 신비가 아닌가? 여기서 야스퍼스의 「交通」이 이뤄지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 수녀님의 말씀은 신의 섭리에 맡기라는 뜻일 것이다. 하지만 德이 이 자연적인 것을 啓發하는데 있다면, 그 본질이 결국 사랑이라면, 모든 진실한 사랑이 하나로 일관한다면 수도자는 정말 부모를 끊고 가족을 떠나야할까?
토마스머튼은 그의 自叙傳에서, 신이 자연적 友情을 통해 歸依시켰음을 거듭 말했다. 모니카는 아프리카에 떨어져 있으면서 기구만을 했던가? 비오 10세는 교황이된 후, 자기 동생들에게 『나는 여전히 너희들의 오빠』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신은 기적만을 行하지는 않는다. 그런 일은 거의 없다. 물론 자연적 境地에서 신의 은총에 의하여 聖化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은총에는 길이 필요하다. 참말 신은 기적을 원치 않는다. 사랑에는 自由가 필수적이라면 기적을 바라는 것은 背理的이 아닐까?
父母를 섬기는 것은 神이 人間을 위해 준 戒命中에 제1조다. 그러나 修道者가 되는 것은 선택의 경우다. 그리고 그것은 神의 戒命을 좀더 잘 실천해보려는 뜻의 사람들 간에 형성되는 모임이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분명히 이것을 表出시키는데 더 큰 노력이 이뤄지는 장소일 것이다.
무턱대고 집착에서 벗어나야 한다고만 주장하는 佛敎가 人格的神을 잃어버리고 공허한 凡神論에 빠지고 마는 것은 조금도 이상스럽지 않다. 수도원은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다. 『단지 세속정신에서 떠났을 뿐이다』 (拙譯풀톤·쉰著화 「영혼의 평화」출판 중) 『무슨 일을 하려면 뒷말이 많아서』 바로 여기에 세속정신이 있다. 즉 여론을 그의 生活규준으로 삼고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사랑은 고통을 즐거이 참을 수 있게 만들어준다. 사랑은 반드시 희생을 포함 한다. 『묵상을 하는데 그런 일 때문에 분심이 들어서…』 글쎄 나는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에게 묵상의 본질을 강조하고 싶다. 도대체 인간의 묵상 소재는 무엇일까? 세상에 살고 있으면서 세상과 그 안에 있는 우리 형제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지야 않겠지. 神을 사랑하는 것과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은 구분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두面일 뿐이다. 우리의 신앙은 밖에서 보듯, 예식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 자체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와 호흡을 같이한다. 그런데 여기에 따로의 장소와 시간이 구분될 수 있을까? 神의 現存이 무의미해지지 않는가? 참말로 神은 인간이 자연적 경지에서, 神의 은총에 의하여 자연적인 방법을 통해 聖化되도록 섭리한다.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있을 것이 아니라 항상 「있는」 神의 영원성을 좀 더 이해할 수만 있다면 人間의 有限性 때문에 생겨나는 제한을 구태여 사랑이라는 신비의 경지에까지 암영짓지는 않을 것이다. 수도자는 올바른 의미에서 진실로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며 자연적인 신의 모상을 가장 잘 구현시키는 사람들이다. 「얀세니즘」이 斷罪된지도 이미 오래된 지금 이런 것을 길게 論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기구만 하면 될 것이라고 어처구니없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기구란 現實이나 行動과 분리된 것이 아니며 염경만이 기구가 아니라 묵상(MEDITATIO)도 있으며 그보다는 사랑으로 인한 움직임 자체가 기구라고 말하고 싶다. 정말 기구는 독립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을 이끌어가는 한面이다. 따라서 지정된 양식(模式)이나, 制限이 있을 수 없다.
현대와 같이 무질서하고 혼돈에 빠져있으며 不條理하고 不安定한 사회일수록 기구와 사랑에 대한 올바른 마음가짐이 꼭 필요하다고 본다. 『사랑하여라. 그리고 모든 것을 하여라.(아우구스띠누스)』 神은 일반적으로 기적을 행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자연적인 경지에서 神의 은총을 통하여 자연적인 방식으로 聖化되도록 섭리한다. 자연적인 방식은 친구간의 우정, 형제간의 사라, 부모와 자식관계 선생과 사제라는 사이, 우리에게 익숙해있는 자연스런 모든 「카테고리」의 狀況들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데서 선구자적인 구실을 하는 사람들이 곧 修道者라고 생각한다.
柳炳華(가톨릭大學新學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