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蟋蟀(실솔) (16) 陰地(음지)의 生命(생명)과 陽地(양지)의 化石(화석) ③
발행일1968-02-04 [제604호, 4면]
정식이 안양농장으로 윤식을 찾아갔을 때 윤식은 난로불을 피워놓은 넓직한 방에 앉아서 조각을 하고 있었다.
『뭘 만드는 거야?』
정식이 붙었다.
『뭐가 될지 모르지』
윤식은 무뚝뚝하게 대꾸 했다.
『하긴 심심할테니까!』
그러면서 정식은 힐끗 윤식의 눈치를 살핀다. 얼굴은 창백했으나 눈빛은 전 보다 침착해진 것 같았다. 윤식은 나무을 파던 칼을 버리고 담배를 끄내어 붙여 물었다. 조춘(早春)의 농장풍경을 창문안에서 얼마동안 바라보고 있던 윤식이
『일전에 윤이씨가 왔더군』
하고 뿌듯히 뇌었다.
『윤이가?』
정식의 얼굴빛은 눈에 보이게 달라졌다.
『형은 모르고 있었어?』
윤식이 돌아서서 정식의 얼굴에 강한 시선을 보내며 물었다.
『요즘 바빠서… 집 설계 때매』
감정을 수습하려고 애쓰며 말했다.
『내가 지랄한 것 윤이씨가 안 모양이지?』
『………』
『형도 물론 알았을 테고』
『그걸 어떻게 알았어』
정식은 고통을 참으며 겨우 되물었다.
『혜영이가… 암시를 주더구먼』
『……』
『형은 내가 미울거야』
『……』
『하지만 오해는 하지 말어. 윤이씨에 대한 것은 어떤 복합(複合)의 형태야』
『복합이라니?』
『이를테면 비인간적인 것에서의 탈출구… 그런 감정이야. 집엔 인간이 한 사람도 없거든. 그게 하나의 집념으로 굳어져 버렸어. 나는 숨이막혀 할 수가 없었어』
그런 이야기가 이제는 정식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윤이가 왔다는 것만이 궁금했고, 아니 궁금했다기 보다 심한 배신감 불안감이 먹구름처럼 그의 마음바닥에서 여울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이제는 윤식이 이상한게 아니고 자기 자신의 머리가 돌아갈 것처럼 생각되었다.
『나는 형처럼 비인간적인, 그런 모형이 될 수는 없었어. 어쨌든 윤이씨를 동경하고 사모한 것은 사실이야, 변명할 필요도 없겠고 또 반드시 그 사랑이 보답 받으리라 생각지도 않어, 윤이씨는 나를 동정했을 뿐이고… 그러나 그 동점만이라도 내게는 끔직하게 큰것 이었는지 모르지』
『윤이가 와서 뭐라든?』
『내가 윤이씨를 어쩌구 저쩌구 했다는 말은 일체 안하더군』
『그럼 무슨 말을 했어』
정식의 어세는 거칠었다.
『형! 형이 흥분하면 나도 이상해진다. 내가 형을 타인으로 보아야겠어? 그리고 말해봐. 형은 여태까지 날 타인으로 보지 않았는가』
정식은 말문이 막혔다. 윤식은 쓰디쓴 웃음을 띄며
『한마디만 말해줄께. 형을 괴롭혀 주기 위한 뜻은 아니야. 듣기에 따라 윤이씨는 형한테 무엇을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고도 할수 있을 테니… 윤이씨는 그러더군. 나는 음지의 생명이구 형은 양지의 화석이라는 거야. 어쩌면 두 사람은 다 눈먼 귀뚜라미인지도 모른 다구』
하고서 윤식은 자초의 웃음을 띄웠다.
『두 사람은 다같이 눈먼 귀뚜라미고?』
『나면서부터 무엇인지 저주를 받았다는 이야기는 아닐까?』
정식의 혼잣말에 윤식의 말이 덮씨워지듯, 정식은 전율을 느낀다.
그는 언제가 밤에 그러니까 윤식이 발광했다는 소식을 듣고 M시로 내려가기 위해 자가용을 기다리는 동안 어머니 방에 들어갔던 일을 생각했다.
(어머니)
(………)
(우리 외가는 없읍니까?)
(………)
(모두 일찍 돌아가셨어요?)
(벼란간 왜묻니)
(너무 적적해서요)
(그런게 아니겠지. 알고 싶은 일이 생긴거지?)
하며 옥여사는 싸늘하게 웃었던 것이다.
정식은 안양에서 서울로 돌아와 윤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이는 없다고 했다. 어디갔느냐고 재우쳐 물었을 때 모른다는 싸늘한 대답이었다.
물론 식모아이의 목소리이기는 했으나 정식은 좌절감을 느낀다. 자기 자신도 좀 뻗대어보노라고 그동안 윤이를 만나지도 않았고 전화를 걸지도 않았다.
꽤 오랜 동안이었는데 윤이 쪽에서도 아무런 소식이 없었던 것이다.
어떤 결렬을 대비하고 상처를 조금이라도 덜 받기 위해 도사렸던 정식의 마음은 와르르 무너졌다.
그는 어떻게 해서 집에 까지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이층으로 이르는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 올라가는데 그는 슬픈 사랑의 종말을 생각하며 울고 싶은 마음보다 역시 패배당하였다는 절망을 더 많이 느끼는 것이었다.
(어떻게 하지? 당장에라도 수속 밟아서 떠나버릴까? 떠나버리면 난이 감정에서 놓여 날 수 있을까) 이때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중에 와라!』
정식은 봉앤줄 알고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러나 옥여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