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議會(공의회) 精神具現(정신구현)을 위한 刷新(쇄신)의 道程(도정) ⑦
分裂原因(분열원인)…人爲的(인위적)
支配慾(지배욕)·權威(권위)·不和(불화)·질투·시기·원한·不信(불신)
排他(배타)·虛榮心(허영심)·악한 表様(표양)·中傷(중상)등 是正(시정)을
再一致(재일치)를 向(향)하여
우리는 前稿에서 진정한 일치의 길이아닌 다섯가지 방법론을 검토했다. 그러면 재일치를 가능케하는 기본정신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말해서 모든 크리스챤들이 교파적인 고집을 버리고 복음정신에 투철하는 것 뿐, 다른 길은 없다. 요한 교황과 공의회의 가르침이 바로 이점을 강조하고 있다. 모든 크리스챤의 일치를 바라는 사람들은 정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이신 그리스도의 교회를 분열시킨 역사적 과오를 직시해야 된다. 그리고 솔직하게 각 교파의 책임과 과오를 인정하고, 서로가 상대방을 용서하는 아량을 발휘해야 될 것이다. 우리들은 피차에 얼마나 주의 포도밭을 어지럽게 하였는가에 대하여 단체적인 통회를 해야 되겠다.
그리스도교가 분열된 역사적 사건들의 바닥에는 얼마나 추한 인간의 죄악이 도사리고 있는가? 교파간의 무한한 지배욕과 權力이나 權威의 남용으로 인한 不和와 질투·시기·원한·不信등이 있었고, 東西方敎會상호간의 배타적 우월감이 넘어설 수 없는 장벽을 쌓아왔으며 이 집단적인 교만은 자기지역에서 유아독존적인 행세를 하게끔 환경을 만들어갔다.
거기에다 겹쳐서 敎役者들의 허영심과 지도급 신자들의 악한 표양이 상호간의 비난과 중상의 온상을 제공하였고 나아가서 교파간에 감정을 자극하여 점점 더 멀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일치운동의 첫단계는 이런 과거의 장애물을 극복해나가는 노력이다. 과거를 청산하는 첫걸음은 두말할 것 없이 自我批判이다. 그리스도교의 宗主임을 자부하는 가톨릭교회도 구성하는 인간들은 역시 부족한 인간들이기에 실수도하고 범죄도 하는 것이다. 이런 인간들의 잘못으로 그리스도의 거룩한 신비체에 누를 끼친 것이 많으니 만큼 우리교회 内部에서 깊은 자기반성을 해야 된다.
어느 사회에서나 上位者는 在下者에게 비판당하는 것을 싫어함은 자연적인 현상인 모양이다.
그러나 소위 신성하다. 云云하는 종교사회일쑤록 지도자들은 비판을 싫어한다. 이런 현상은 그 사회를 빨리 타락시킬 뿐아니라 大衆은 쓸모없는 법절에만 치중하고 내용이 공허한 형식적 생활태도를 가지게 된다. 지도층의 잘못이 비판되고 알려지면 소위 신덕이 약한 교우들에게 「악한표양」이 된다는 구역질나는 구실로 얼버무려 버리니, 백년가야 개선될 리가 없다. 우리는 교회의 지도층인 성직자사회가 좀더 솔직하고 겸손하기를 바란다. 그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기본적 태도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일치운동은 열열한 기도의 뒷받침 없이는 불가능하다. 우리의 희망은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하는 것이지 인간적인 꽤에 기대는 것이 아니다. 당장에 불가능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어느 시기에 성신의 전능으로 재일치의 은혜를 받을 것이다.
우리는 상호간의 無知와 편견과 오해를 극복할 힘을 구할 것이다. 그리고 의구심과 원한과 시기심을 없애주시기를 기구할 것이다. 또 각 교회가 저들의 역사적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도록 기구하고 모든 교회의 지도자들이 이 어려운 문제에 대처해 나갈 용기와 슬기를 주시도록 기구해야 된다. 모든 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신비를 더 깊이 깨닫고 더 적절히 표현할 지혜와 지식을 얻게끔 모든 목자들이 교파간에 이해를 촉진시키는 좋은 司牧方法을 발견하고 실천할 수 있게끔 기구해야 되겠다. 우리의 기구는 다른 교회를 위해서도 행하여 져야 된다. 우리뿐 아니라 저들도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전진하기를 위하여, 그리고 교파간의 협력이 증진되기 위하여 기구할 것이다. 이 마지막 조건 즉 모든 그리스도교도들이 대화와 협력의 자세를 갖도록 기구함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歷史上 여러번 부분적으로나 전체적으로나 지도자들 간에는 和解도 성립되고 일치문서도 서명했지마는, 大衆의 자세가 준비되지 아니했기 때문에 死文化된 일이 있었던 것이다.
셋째로 과거를 반성하고 기도를 통하여 主께의지하면서 우리는 장래를 준비해야 되겠다.
장래할 일치에 대비하는 교회생활은 교회의 내적 생활은 말할 것도 없지마는 外的생활도 복음에 준하여 쇄신되는데 있다.
사도시대의 초대교회는 그리스도와 가장 가까운 시대의 신자생활을 잘 보여준다. 20세기 교회가 대교회의 외모를 그대로 답습할 수도 없거니와 있더라도 그것은 「넌센스」이다.
그러나 우리는 내용뿐 아니라 外機에 있어서도 초대신자들의 정신을 본따서 조절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교리상, 그리스도의 절대적 우위성이 명백하고 성서가 교회학문의 중추를 이루고 있으며, 전례는 실생활을 그대로 승화시킬 구조와 힘을 발휘하였다. 단체생활이나 사생활에 있어서 律法보다 사랑의 神法이 절대적 권위를 가 졌고, 교회단체나 개개인의 신앙태도가 거룩한 단순성을 나타내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의 교회도 이론이나 실천에 있어서 과도한 것은 제지하고, 불필요한 것은 제거하고, 군더덕은 폐지함이 타당하다.
그리고 기본적이요, 본질적인 요소를 더 명백히 나타내고, 부수적이 요 인간적 고려에 의한 것들은 뒤로 돌려야 되겠다.
교회의 재일치를 위하여 인간편에서 기여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모든 크리스챤들이 보다더 그리스도의 진리를 각색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데 있다. (계속)
鄭夏權(解博·馬山중앙본당주임·本社論說委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