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 12世(세)와 第(제)2次(차) 大戰(대전)과 유태人(인) 問題(문제)
유태인들 敎宗(교종) 沈默(침묵)에 謝意(사의)
各國元首(각국원수)들에 戰爭防止(전쟁방지)를 呼訴(호소)
「바티깐」 公議會(공의회)를 愼重(신중)히 計劃(계획)
【로마 NC】 교종 비오 12세때 성청에서 중책을 맡았던 에수회 라이벨 신부를 찾았을 때 그는 평소와 같이 즐겁게 대해주었으며 「유모어」를 잊지 않았다. 그러던 라이벨 신부가 몇달이 지난 2월 18일 세상을 떠났다. 일언이 폐지코 나치의 유태인 학살에 대한 비오 12세의 태도를 중심으로 라이벨 신부의 증언을 들어보자.
▲비오 12세를 도와 한 일은?
○라이벨 신부 - 독일에 관한 일 뿐 아니라 그외 여러가지 일들을 내게 일임했다. 교종을 대신하여 민중이 좋아하건 싫어하건 교종의 명령을 실천한 것 뿐이다. 그러나 당시에 교종 비서라는 직위가 없기도 했으려니와 나는 교종의 비서도 아니었고 공식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성청의 정식 직원도 아니었고 교종 관저에서 머문 적도 없다. 때문에 비오 12세의 장례식에도 참석치 않았다.
▲교종은 자문을 두지 않고 실무자들만 두었다는 걸로 기억하는데?
○ 라이벨 신부 - 사실이다. 비오 12세는 명령을 내리고 우리는 그것을 실천하고…하지만 실천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조금도 간섭하지 않으셨다.
▲비오 12세께서 공의회 소집을 생각하신 일이 있는가?
○ 라이벨 신부 - 가끔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내적 난관과 실패할 가능성도 내다보고 있었다. 다행이도 공의회는 실패하지 않았다.
(최근 공개된 「독일주교들에게 보내는 비오 12세의 편지」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가운데 라이벨 신부는 아직 일반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비오 12세의 여러가지 사실을 말했다.)
1939년 초여름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몇달전에 그는 미국, 영국, 불란서, 독일을 향해 전쟁을 사전에 방지키 위해 논의할 것을 요청했다. 히틀러의 심려가 가장 중요했다. 1939년 3월 6일 히틀러에게 편지를 보낸 것도 이 때문이었는데 히틀러는 국제협상이 필요치 않으며 폴란드와의 난문제는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회답했다.
다른 열강국들은 전쟁의 위험이 없다고 단정했지만 결국 몇개월 후에 전쟁이 터지고 말았지 않았는가? 아시다시피 교종은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다.
▲히틀러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줄 알았던 사람도 있었을 줄 아는데?
○ 라이벨 신부 -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은 공포에 질려 입밖에 내지를 못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았고 1938년 히틀러가 「로마」를 방문했을 때 교종 비오 11세가 그를 만나기를 싫어했다는 말은 거짓이다. 비오 11세는 그를 직접 만나려 했지만 나치당원들이 이것을 방해한 것 같다.
▲빠첼리 추기경은 독일의 교종대사를 역임했기 때문에 히틀러의 인품을 잘 알았을 것이고 또 히틀러와의 정교조약은 히틀러의 위치를 더 강대하게 하고 상대를 약화시키는 것임을 알았을텐데 교종 비오 11세에게 정교조약을 왜 반대하지 않았나?
○ 라이벨 신부 - 빠첼리 추기경은 분명이 그런 사실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정식조약보다 임시조약을 체결할 것을 말했다. 하지만 히틀러는 가톨릭신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정식으로 조약을 체결할 것을 주장했고 교종은 거부하면 평화파괴자로 몰리기 때문에 윤리적으로 이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조약을 거부했다면 독일신자들이 받은 위험은 더 컸을 것이다. 1933년 조약이 체결될 때 독일인들은 일반적으로 히털러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뒤 1936년 회칙 「심심한 심려」를 발표했을 때는 이러한 호감이 사라졌다.
▲「로마」가 전쟁피해를 받지않았던 것은 비오 12세의 덕분이겠는데요?
○ 라이벨 신부 - 그렇게 볼 수 있다. 교종이 「로마」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도시를 보호했었다. 그느 「까스델 간돌포」의 여름별장에도 가지 않았다. 자신의 안일은 완전히 멀리했다.
▲유태인 학살에 대해 왜 교종은 침묵을 지켰는가?
○ 라이벨 신부 - 정식으로 항의해야 할 이유가 많았듯이 그렇게 하지 못할 이유도 많았다. 교종은 이모든 이유들을 참작했다. 만일 교종 비오 10세 같았더라면 언성을 높여 항거했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개인의 성격문제인가?
○ 라이벨 신부 - 그렇지 않다. 지혜의 문제다. 만일 공식으로 항거했다면 더 큰 위험이 닥쳤을 것이다. 당시 비오 12세와 같은 인물이 교종직에 잇었다는 것은 섭리라고 생각된다. 많은 유태인들이 나중에 교종의 침묵을 기뻐하고 교종을 특별안현하여 감사를 표한 바 있다.
(1958년 10월 9일 교종 비오 12세가 서거한 후 1962년까지 라이벨 신부는 「그레고리안」대학에서 역사과학의 방법론을 강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