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생도 「천주의 뜻」에 맡긴 盧(노) 대주교
한국인 초대 주교, 서울대교구장 노기남(65세 · 바오로) 대주교가 3월 27일 오후3시 37년간이나 정들었던 명동성당을 떠났다. 노 대주교는 이날 아침까지도 평상시와 같이 미사를 드린 뒤 11시반경 수원교구 윤 주교에게 은퇴사실을 알리고 모든 공직에서 떠나 오후3시 안양 「나자로」 요양원으로 발길을 향했다.
노 대주교님은 3월 10일(?) 교종께 사퇴원을 제출하고 지난 24일 교종공사관을 통해 은퇴승인통지서를 받았다. 은퇴를 발표하자 극소수의 측근신부 외에는 모두 어리둥절해 했다.
노 대주교님은 1901년 평양시 선교리에서 11남매중 막내로 태어나 12세때 가톨릭에 입문, 1930년에 사제가 되었다. 그로부터 신부로 12년, 서울교구 주교로 20년, 대주교로 5년 무려 37년이란 긴 세월을 명동성당과 같이했다. 우리나라 가톨릭의 상징인 노 대주교가 『늙어서 기력이 없다』고 갑자기 은퇴를 발표함으로 인해 종신토록 교회일에 헌신하리라고 믿었던 신자들과 일반인들은 자못 놀라움과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주교 정년퇴직은 75세, 대주교품은 종신)
노 대주교 측근에 의하면 행정적인 일은 따로 떼어 윤공희 주교에게 맡기고 노 대주교는 상징적인 최고지도자로 계속 현직에 남도록 만류한 적도 있었으나 노 대주교 자신이 끝내는 은퇴를 고집했다고 한다. 교정관할권은 서울대교구에 한정된 것이긴 하나 주교단의장직 등 25개 성상을 한국교회의 최고지도자로 역임해 온 그는 한국가톨릭사를 점철한 9인의 불란서인 주교에 이어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제10대 서울 주교직에 오르게 됐는데 1942년 주교임명 때 일본정부가 일인주교를 선임하려는 것을 원 주교가 눈치채고 즉각 「바티깐」으로 연락하여 노 대주교를 임명케 한 것이다. 일제탄압을 겪으며 명동성당을 지켜왔고 해방 후에는 경향신문을 창간 이승만 정권의 갖은 탄압을 받아가며 언론으로 구국에 이바지 했다. 62년 6월 29일 한국에 교계제가 설립, 대주교로 승격되었고 1백여만 달러의 기금으로 성모병원도 세웠다. 6·25사변으로 모든 성당이 잿더미로 변하자 구라파에 13차, 미국에 3차, 카나다 등지를 순방하며 굶주림과 병고에 시달리는 전재민구호와 파괴된 성당을 재건에 몸과 마음을 바쳤으며 수방하는 동안 프랑스와 이태리의 「최고문화훈장」도 받았다.
장차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한국교회의 재건을 위한 구제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외국을 순방할 계획이라고 한다.
■ 현대적응에 앞장설 尹(윤) 주교
1942년에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주교에 임명되어 꼭 25년간을 교구사목에 노고한 노 대주교님이 주교로 임명되기 전에 본당 보좌신부 시절부터 정들었던 면동 대성당을 쓸쓸하게 떠나고 한국인 주교 중 가장 연소(年少)한 윤 주교님(만42세)이 교구장으로 취임한 서울대교구 주교좌본당인 명동성당은 여느때와도 같이 조용하기만 했다.
윤 주교님은 서울대교구장을 겸임하게 됐다는 오후 2시반의 정식 발표를 하기에 앞서 약3시간반 전인 상오11시에 이미 서울에 도착, 떠나게 될 노 대주교님과 오찬(午餐)을 함께했으며 이날 밤에는 계동에 있는 전주교중앙협의회에서 유숙하고 다음날인 28일에는 아침 9시 정각에 주교관에 도착했다.
주교실에 들어선 윤 주교님은 먼저 주교관 직원들의 인사를 받고 이어 찾아온 이 기중(도마) 신부를 만나 따뜻한 위로와 함께 문앞까지 부축하여 『보행이 불편하시지는 않습니까?』고 염려하기도 했다.
그런데 오후2시경에는 신문보도를 통하여 뒤늦게 윤 주교님의 서울대교구장 겸임을 알게된 수원교구의 상서국장 신부가 교구업무 관계로 (記者의 推測) 바쁜 거름거리로 주교님을 찾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