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文學(문학)과 問題意識(문제의식) 第(제)4回(회)
信仰(신앙), 旣定事實(기정사실)로서가 아닌 內的誠實(내적성실) · 正直(정직)으로 追求(추구)돼
作家(작가) … 惡(악)의 追求(추구)로서 하나의 共犯者的(공범자적) 役割(역할)
明示(명시)된 戒律(계율)로 罪意識(죄의식)에 쫓겨
가톨릭文學(문학)만의 특수意識(의식) 內容(내용)
戒律(계율), 罪意識(죄의식) 聖事(성사), 冐領聖體(모령성체) 등
내가 너무나 신덕도리에 저촉(抵觸)되다 시피하는 문제만을 끄집어 내고 있고 또 문학자드은 왜 신앙으로 믿지않고 그렇듯 회의(懷疑)와 추구(追求)만을 일삼느냐고 반문(反問)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저만한 내면적 정직과 성실성과 추구력 없이는 실제 진정한 문학은 성립되지 않는다.
아니, 실상 참된 십자가의 신앙도 발생하지 않는다. 여기서 말머리를 돌려 이번엔 가톨릭문학이 일반문학과 다른 특수한 의식내용의 예를 좀 살펴 보기로 하자. 지난번에 인용한 그레암 그린의 「사물의 핵심」 속의 모령성체(冒領聖體) 대목인데 『부인이 정양(靜養)을 간 동안에 정부(情婦)가 생긴 주인공 스코비는 부인이 돌아와도 시침을 뗀다. 그러나 여자의 본능으로 이를 예감(豫感)하는 부인은 그다음 주일, 남편과 성당에 가며 만일 남편이 성체를 영하면 마음에 거리낌이 없는 증거요 만일 남편이 성체를 안 영하면 이는 무슨 탈(姦淫을 犯한)이 난 증거라고 내심에서 시험한다. 이러한 부인의 속을 환히 아는 남편 스코비는 두가지 공포에 고민하게 된다.
즉 그가 성체를 안 영하면 아내에게 자기의 정사(情事)가 발각됨으로써 그녀를 질투와 무한한 고민 속에 몰아넣게 되고 성체를 영하면 모령성체를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십자가를 지고 비틀거리는 그를 자기가 또다시 매질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고 괴로워 한다』는 이야기 줄거리다.
저러한 주인공의 고민과 그 아내의 심리기미(心理幾微)는 가톨릭신자가 아니고는 도저히 상상도 못할 것으로 대죄를 짓고서 소해를 받지 않고 성체를 모신다는 것이 교우로서 얼마나 공포가 따르는 범죄인가를 불공(佛供)이 끝나면 마음에 죄가 있거나 없거나 참예했던 사람은 다 함께 음복(飮服)을 하는 불교도나 시제(時祭)를 모시고는 제수(祭需)를 동네 사람에게 모두 노나먹는 우리 유교풍습에 젖은 사람이거나 성사와 미사를 모르는 기독교 신자들에게는 이해가 안갈 것이다.
주인공 스코비는 이어서 탄식하기를 『오오! 천주여 저는 언제나 스스로 대답(信德道理나 敎會의 가르침 - 筆者 註)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저만이 죄인이 올시다』라고 한다. 이 『언제나 스스로 대답을 알고 있다』는 말이야 말로 가톨릭에 뿌리박은 신앙을 가지지 않고서는 나오지 않는 말이다.
내가 처음 회(回)에서도 언급했지만 일반 비신자들은 우주나 인간이나 사회의 본질적인 의미를 알려고 그야말로 암중모색(暗中摸索) 하지만 가톨릭인들은 이미 신이나 인간이나 만물 만사에 대해서 너무나도 명백한 정의(定義)와 결론을 갖고 있기 때문에 또 그 행동규범(行動規範) 마저도 명시(明示)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난다는 자체가 벌써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가 「죄를 범하는 줄 알면서」 간통을 하고 모령성체를 하고 자살을 하고, 이러한 공포와 전율을 느끼면서 자기를 영원히 멸망시킨 각오마저 가지고 스코비는 그 길을 택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천주께 『당신 손이 닿지 못할 곳(地獄)으로 제가 가면 당신이 평안 하실 것입니다』라고 부르짖는 것이다.
우리 동양불교에는 다정불심(多情佛心)이라는 직관(直觀)의 세계가 있어 오히려 저러한 소식(消息)을 이해하기 용의한 면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저러한 서구(西歐) 가톨릭 작가들의 치열한 추구는 그러한 범신적(汎神的) 이해가 아니라 곧 문학의 시앙적 대결의 경지인 것이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 교리신학에 향한 도전(挑戰)이라고도 하겠다. 그외에 가톨릭문학자들이 치르고 겪는 고민과 대결에 세계란 한이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내면에 숨어있는 인간의 악을 그려가는데에는 그 죄와 악과의 또 하나 색다른 공범자(共犯者?)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 가톨릭문학의 대표라고 까지 말할 수 있는 죠르쥬 베르나 노스는 그의 작품 「악마의 볕 아래서」의 주인공인 도니산 신부의 입으로 『나도 이전에는 마귀에게 이기지는 못햇어도 싸우려는 투지(鬪志)만은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악마의 발 아래 깔려 있다』고 탄식케 한다. 이것은 널리 알려지다시피 위안네 신부를 「모델」로 하였다고 하지만 또한 그 작가의 내면의 토로(吐露)이기도 할 것이다. (계속)
■ 筆者의 詩 - 祈禱
땅이 꺼지는 이 요란속에서도
언제나 당신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게 하옵소서.
내 눈을 스쳐가는 헛개비와 무지개가
당신 빛으로 스러지게 하옵소서.
부끄러운 이 알몸을 가리울
풀잎 하나 주옵소서.
나의 노래는 당신의 사랑입니다.
당신의 이름이 내 혀를 닳게 하옵소서.
具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