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年(년)에 韓國敎會(한국교회)가 해야할 時急(시급)한 일 (8)
謙遜(겸손)한 마음으로 이웃을 섬겨야 해
발행일1967-04-09 [제563호, 1면]
옛날부터 종교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과 독선을 지녀왔다. 마치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을 천시하듯이 세력을 누리는 사람들이 무력한 사람들을 얕보듯이 남다른 지혜와 학식을 가진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이웃들을 가벼히 여기듯이, 종교와 신앙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종교 신앙적인 생활을 존중히 여기는 나머지 같은 신앙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자기만 못한 사람인 듯이 낮게 보았고 또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적대시 하는 경향까지도 없지 않았다.
기독교도 하나의 종교이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자칫하면 꼭같은 과오를 범하기 쉬운 위치에 머물고 있다. 쉬울 뿐만이 아니다. 이미 과거에는 그러한 과오를 많이 범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종교전쟁 때문에 일어난 사회적 혼란과 무질서 그에 따르는 시민들의 불행은 얼마나 컸던가.
지동설을 주장했다고 해서 과학자들을 핍박했던 과거는 교회의 잘못이 아니었던가. 신구 양교가 수백년 동안 등지고 살아온 과거는 누구들의 과오였던가. 수백년을 기독교 전통에서 자라온 러시아 제국이 불과 몇년동안에 공산세계로 바뀔만큼 정신과 사회적으로 무능했던 책임은 누가 져야 하는가.
이렇게 따져보면 우리의 잘못은 한두가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과오와 잘못을 인정하고 뉘우치는데 인색해졌을까. 예수께서 회개하라고 가르친 것은 먼저 우리들에게 주신 말씀이시다. 그러나 어떤 신자들은 우리가 아닌 이웃과 세상 사람들에게만 회개가 해당되는 듯이 생각한다면 그렇게 큰 잘못이 없을 것이다. 뉘우치고 고칠 사람은 먼저 우리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성서의 교훈 자체에 잘못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의 뜻과 질서에 모순이나 어긋남이 있다는 것도 아니다. 과거에 있었던 모든 잘못과 과오는 성경을 바로 깨닫지 못한 우리들의 잘못, 하느님의 뜻을 지키지 못한 우리들의 부족에 그 책임이 있었던 것이다. 말씀은 지금도 진리이며 하느님의 뜻과 질서는 영원히 우리들의 삶을 심판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우리들 자신이 먼저 그리스도와 이웃들 앞에서 겸손해 지는 일이다.
우리들 스스로의 잘못과 부족을 먼저 고쳐나갈 줄 알아야 한다. 예수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는 찍어버리겠다고 하셨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말이나 높은 예배당이나 많은 수가 아니다. 오히려 이 사회 속에 있어서 얼마나 열매를 맺고 있는가 함이 문제다.
주께서는 나더러 두여 주여 하는 자는 하늘나라에 합당치 않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오늘의 교회는 교인들에게 주여 주여 하는 것만을 가르치고 있지 않는지 모르겠다. 실천이 없는 교훈과 설교, 하느님의 뜻보다는 스스로가 만족하고 싶은 주관적인 관념을 신앙으로 생각한다면 너무나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물은 높은 곳으로부터 낮은 곳으로 흐르도록 되어있다. 그러나 하느님의 진리는 낮게 겸손히 처하는 자로부터 높은 곳으로 향하는 법이다. 오늘의 교회가 시급히 되찾아야 할 정신적 과제는 먼저 잃어버린 겸손이며 그 뒤에 오는 봉사와 보람있는 섬김이다.
이렇게 겸손한 자세를 찾은 우리들이 해야할 다음 과제는 어떤 것인가. 무엇이 우리들에게 주어진 현대적인 사명인가.
그리스도는 내가 주는 새 계명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가르치셨다. 우리의 이웃은 누구인가? 먼 과거의 어떤 인물들은 아니다. 그렇다고 멀리 앞으로 있을 사람들만을 위한다는 생각도 옳지는 않다. 오늘 우리들과 같은 문제, 관심, 운명을 지니고 사는 벗, 이웃들을 내가 신앙안에서 나를 사랑하듯이 사랑하라는 뜻이다 20세기 후반기에 삶을 누리고 있는 이웃에게 하느님의 사랑, 그리스도이 은혜를 전해주는 일이다.
첫째는 이웃들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이 긍정의 진리임을 밝혀주어야 한다.
옛날 이스라엘의 선한 지도자였던 니고데모와 같이 오늘의 지성인들, 경건한 사람들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고. 그들은 불안, 모순, 회의, 비참, 절망을 알고 있다. 우리들 자신도 느끼고 있으며 그 속에서 살아왔다. 그리스도의 진리는 그들의 불안, 모순, 회의, 비참, 절망을 해결 지어주어야 한다. 이 모든 부정적인 여건들을 그리스도의 뜻과 진리로 긍정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둘째로 우리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사랑의 봉사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인간들을 구하이 위하여 인간이 되셨다고 가르친다. 말하자면 신께서 인간의 고난에 동참하셨고, 우리를 그 고난에서 구출하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역시 가난, 고통, 비참, 절망 속에 머물고 있는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는 일이다. 그리고 사랑과 봉사로 그들을 섬기는 일이다. 예수의 십자가의 의미가 바로 그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서로 회피하면서 그리스도의 영광에만 참여하려 한다면 교회는 병들 것이며 사회는 교회를 저버리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