對話(대화)와 自覺(자각)
「神秘體(신비체)」가 完成(완성)에 이를 方便(방편)
성실 솔직한 態度(태도)로 理解(이해) 尊敬(존경)견지하고
사랑으로 因(인)한 善行(선행)의 一切交流(일절교류)
現代世界(현대세계)와의 對話(대화) 緊要性(긴요성) 自覺(자각)
自覺(자각) 自律性(자률성)은 自體內(자체내)의 要件(요건)
현대세계를 對話의 세계라 한다면 對話를 하려고한다면, 우선 自己紹介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를 위해서는 自己반성을 하고 소개해야할 自己롤 發見하지않으면 안된다. 自己발견은 内的인 새로운 自己刷新의 決斷이다. 그러므로 地上의 현실과의 對話의 뜻은 정작 自己自身의 각성을 일러준다. 여기에 靈의 세계가 開拓된다.
(여기서 말하는 對話는 넓은 意味에서의 「하느님의 백성」과의 對話다. 또한 교회內의 對話도 있기에 말이다.)
「꼬뻬르니꾸스」的 轉換이라 할 수 있는 이번 공의회는 새로운 事實을 발견했다. 그것은 「世界」와의 「對話」다. 지금까지 교회는 坐井觀天에만 滿足과 法열을 느껴왔다. 그러나 井中觀天을 벗어나서 이제 陳然하고 광활한 地·天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초특급으로 달리며, 그들이 사용하는 言語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우선 교회는 그들과 같이 급행으로 달려야 하며 그들과 말이 通해야겠다. 이것이 소위 「아지오르나멘또」(「현대사회와의 適應」)라 하는 것이다. 「現代社會와의 適應」과 동시에 對話는 필요하고 현대의 교회論에서 對話의 개념은 교회의 개념과 따로 뗄 수가 없다. 교회의 개념에서 分離시킬 수 없는 이상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다』의 定義와같이 現代世界는 對話의 세계며 또한 對話의 세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면 도대체 對話란 무엇을 意味하는 것인가? 또한 그의 目的이 무엇인가?
對話란 『사랑의 外的인 活動을 위한 사랑의 內的衝動』이다. 일체의 言語와 行爲는 對話가 될 수 있다.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行爲의 일체 交流가對話다. 왜냐하면 『그에게서 온 몸이 各 마디를 通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相合하여 各肢體의 分量대로 役事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워져야』(에페소 4·16)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전「하느님의 백성」의 神秘體를 생각할 수 있다. 神秘體를 구성하는 各 「멤버」들은 그 완성을 보아야하기 때문에 「그리스도」 神秘體의 完成을 가져올 때까지 「바오로」가 말한 소위 「聖徒들을 완전」(에페소 4·12)케 해야 한다. 따라서 對話는 교회 自體의 目的인 「하느님 나라」의 擴張이며 「그리스도」 神秘體의 成長과 增大를 目的으로 한다. 對話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에 있다.
對話는 전세계를 그리스도化하기 위한 것이다.
이제 對話에 있어 우리가 지녀야 할 態度는 무엇인가? 『전 인류에게 복음을 비춰주고, 어떤 國民, 어떤 民族, 어떤 文化를 소유하는 人間을 막론하고 그들을 하나의 靈에로 불러들일 使命을 가지고 성실하고 솔직한 對話를 가능케 하고 그것을 강화하는 「兄弟愛」의 標識가 돼야한다. 그러나 이를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各者는 서로 間의 相違點을 이해해주고 相互間에 尊敬과 마음의 一致를 촉진시키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牧者 信徒들을 막론하고 「하느님의 유일한 백성」을 형성해야할 전 人類와의 알찬 對話가 실현되기 위해서이다.』(현대 세계헌장 92조)
그렇다면 난 우선 司祭로서 취할 態度를 생각해 본다. 『교회의 內的인 刷新, 전 세계의 福音의 宣布, 現代世界와의 對話라는 司牧目的을 달성하기 위해서 항상 높은 聖性을 目標로 삼아 하루 하루 加一層 전체의 「하느님의 백성」에 대한 奉仕를 위한 그 道具가 될 것을 교회는 勸告하고 있다』(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율령 12조) 이것이 내가 가져야할 태도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것이 眞實하고 경건하며 모든 것이 옳으며, 모든 것이 淨潔하고 聖스러우며, 모든 것이 사랑할만하며 칭찬할만하고 기림직 스러우며 모든 일에 德이 있음』 「필립보 4·8)을 推進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賢慮와 親切이 앞서 그들과 對話하고 社會的, 政治的 諸制度를 복음의 精神에 따라 어떻게 完成해야 할 것인가를 研究하지 않으면 안된다.(신자 사도적에 관한 율령 14조)
과연 내 안에 이런 對話에 대한 깊이가 있는가? 自身 안에 이를 반추하는 것 이것이 곧 對話에 앞선 自覺의 문제다. 1963년 9월 29일 제2 會期 開會연설에서 바오로 6세는 『교회는 무엇이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거울로 하는, 그 거울 앞에서 각자는 自己의 참다운 모습을 취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이제 나는 그 面鏡臺 앞에서 司祭로서 自身을 다시한번 비추어 본다. 면경대 앞에 선 自己. 사실 이것은 精神세계에서 운위되는 문제다. 自覺과 自律性을 말한다. 自覺은 自身밖에서 自身을 생각하는 것이며, 自律性은 反省된 自己를 다스려 나간다는 뜻이다. 여기서 「밖으로 나온다는 것」 「나선다는 것」 이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응시하는 自己」와 「응시되는 自身」이 생기게 된다. 편의 상 「응시하는 자기」를 그냥 「自己」라고 하고 「응시되는 자신」을 「自身」이라고 해 둔다.
面鏡臺 앞에 선 나는 「自己」와 「自身」 사이에 처음부터 自覺이 있게 된다. 「응시하는 自己」는 「응시되는 自身」의 밖에 서게는 된다. 사실 엄밀한 의미로 말하면 自身의 밖에 自己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精神세계에서는 이러한 특이한 内部構造가 존재하게 된다.
우리는 흔히 「自覺」이란 말마디를 들을때 너무나도 평범하고 일반적인 말로 그냥 묵과해 버린다. 이와같이 사실에 있어 정신세계에서는 깊은 內容을 지니고 있다. 보통 苦痛이란 그 자체가 人間을 위대하게만 만들어 준다면, 우리가 苦痛에 대한 그 자각 없이 지금 苦痛을 받고 있다고 누가 말할 수가 있겠는가?
「세계와의 對話」는 오늘날에 있어 우리에게 놓여진 중요한 문제다. 그렇다면 그 對話에 대한 自覺없이 정작 對話를 할 것이라고 누가 말할 수가 있겠는가? 「自身을 응시한다는 것」 거기에는 「초월적인 自己」가 있게 된다. 「응시하는 自己」와 「응시되는 自身」 사이의 상호관계를 把揭直視할 때, 이것을 소위 「觀想」이라고 한다. 이 관상은 사랑에 층일되어 「對話의 광장」으로 나가게 된다. 내 눈앞에 전개되는 神을 찾아서 나가게 된다. 「십자가」의 聖 요안의 「靈의 노래」에서 말한바와 같이 『그대의 現存을 내게 일러주소서. 그대는 아시나이다. 사람의 病은 남의 現存과 그 얼굴을 보지 않고는 모든 것이 헛됨을 그대는 아시나이다.』의 神의 現存과 얼굴을 찾아서 對話의 광장으로 나가야 한다.
지금까지 「自覺」을 놓고 이론적인 면을 한번 생각해 보다가 관상에까지 말하게 되었다. 그러면 실지로 나는 「그리스도」 面鏡臺 앞에 서서 자신을 한번 생각해본다. 나의 司祭生活은 이제 1년이 되어간다. 司祭의 갓난 어린애가 면경대 앞에서 자신을 생각해 본다니 어찌 생각하면 우습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나름대로 생각해 본다는 것뿐이다. 위에 말한 對話가 요구하는 自身 안에서의 要件들을 충분히 지니고 있었던가? 그렇지 못했다. 우선 靈神의 의사로서 自身을 진찰할 때 病이 전연 없는 인간은 아니었다. 이제 내 건강과 하늘스런 「清明」을 위해서 안간힘을 다 해서 높아 갈 따름이다.
『내 사람을 찾아서 이산들과 물가를 나는 가리라 꽃들도 꺾지도 않고 들짐승들을 무서워함도 없이 나는 힘센 이들 경계선을 넘어가리라.』 (『십자가」의 요한 성인)
그리고 또 한 가지 그것은 司祭라는 「분위기」 속에서 요새 신식말로 말해서 소위 主體意識을 완전히 고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마치 시골뜨기가 都會에서 어리둥절한 것과 같았다. 우선 면경대 안에서 비쳐지는 自己는 이 두가지가 현저히 들어난다.
끝으로 나의 가장 존경하는 스승과 그리고 나를 관심있게 보아주는 선배님들에 대한 그 보답을 생각해서라도 自身을 다시 한번 일깨운 채, 사랑의 對話를 위한 충분한 자신 안에서의 「內燃力」을 기르도록 노력할 뿐이다.
金正元(전주·중앙보좌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