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議會(공의회) 精神具現(정신구현)을 위한 刷新(쇄신)의 道程(도정) ⑧
敎會(교회) 世上(세상)을 알고 바른 方向感覺(방향감각) 提示(제시)해야
信者使命倍增(신자사명배증)·信仰生活化(신앙생활화) 緊要(긴요)
世界(세계)와 더불어
우리는 前에 교회를 묘사하기를 『歷史안에 신비롭게 살아계시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는 이 교회를 통하여 당신의 구세사명을 계속하고 있다. 즉 교회의 사명은 그리스도를 세상에 주고, 온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 복음화시키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교회의 복음화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무엇보다 선결조건은 교회가 세계를 알아야하고 천주께서 사랑으로 창조하신 세계의 진정한 모습과 가치를 바로 인식함이다.
공의회는 그 여러가지 헌장과 율령을 통하여 모든 신자들이 자기의 성화뿐 아니라 세계의 구원을 위하여 응분의 협력을 아끼지 말것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狹義의 사회참여를 포함해서 인생과 세계에 대한 그리스찬의 사명과 책임을 일깨워주는 것이다. 또 이러한 책임을 다하려면, 종래의 소극적인 신앙관과 부정적인 현세관에서 과감히 탈피하여, 적극적이요 긍정적인 사상과 능동적이요 건설적인 활동으로 세계에 임하기를 촉구하고 있다. 여기에 소위 세계와의 대화의 자세가 요청되는 것이다.
많은 신자들은 아직까지도 신앙은 교회당에서 생활은 사회안에서 따로 따로 영위하고 있으며 어쩌다가 갖게된 신앙을 자기안에 폐쇠해 두고 내영혼만 구하면 된다는 소극적인 자세로 살고 있다. 그러나 깊이 그리스찬의 사명을 생각하면, 세계의 모든 인간가족이 주안에 성화됨을 추구하지 않고 개인의 이기적 구원이란 있을 수 없다. 개인적인 수계범절이 어떠한 모양으로든지 타인의 구원과 연결되지 아니한다면 참된 복음적 신심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 마지막으로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에 『가서 민민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지, 너희 신앙을 모말밑에 감추어두라고 하지 아니하셨다. 모든 신자는 성세성사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의 예언직과 사도직과 왕직에 참여하는 특전을 받았기에 그리스도교도의 생활은 그리스도의 생활을 자기안에 구현시키는데 있다.
그리스도의 예언직에 참여함은 그리스도의 진리를 말과 행동으로 증거하는 것이요, 그의 사제직에 참여함은 자기성화를 통하여 세상의 성화를 이룩하여 주께 봉헌함이요. 그의 왕직에 참여함은 세상의 제반사가 천국의 원리대로 진행되어 하느님의 뜻이 지상에서도 이루어지도록 노력함이다.
이러한 복음화의 사명은 세상을 기피하거나 반대만하는 태도로써는 달성할 수가 없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세계를 연구하고 이해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세상의 불안전성과 인간의 죄악으로 빚어진 상처를 치료하고 세상의 모든 바르고 참된 것과 착하고 아름다운 것을 점점더 키워 나가는 활동이 필요하다.
특히 현대문명은 점점 더 기술화하고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고 있으며, 새로운 시대의 문화조류는 종교적 윤리적 바탕을 상실해 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대인은 그 풍부한 물질적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심각한 정신적 빈곤에 허덕이고 있다. 그리스도교가 현대세계에 주어야 할 것은 바른 方向感覺이다.
이 많은 생산물과 고도의 기술과 과잉하는 여가와 훌륭한 제도에도 불구하고, 세계인구의 4분의 3이 기아와 무식과 공포와 부자유와 죽음에 당면하고 있다. 또 이런 상태를 개선하기 위한 수많은 시도들도 그것이 순전히 현세적이요 찰나적인 원리와 기술에 의존하기 때문에 그리고, 각 분야가 조물주의 설계안에 제위치를 가지고 있지 않고, 가치의 서열을 모르기 때문에, 만족할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교회헌장이 명시하는바와 같이, 인간의 어떠한 행위라도, 비록 그것이 현세적 사정에 관한 것이라도, 하느님의 지배에서 제외될 수는 없는 것이므로, 반드시 윤리적이요 종교적인 次元과 관계되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교적인 물리학이나, 가톨릭적인 원자학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물리학이, 그 원자학이 그리스도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서 이용될 때 그 결과는 비참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은 우리들의 경험이 벌써 웅변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하느님의 백성의 모든 구성원은 세계가 복음화 되기 위하여 응분의 기여를 해야되겠지만, 특히 신분이 이 세속가운데서 세상일을 직접으로 관리하는 평신자들의 책임이 막중하다. 평신자들은 사회참여에 있어서 성직자나 수도자보다 더 유리한 처지에 있고 더 큰 역량을 가지고 있다. 오늘의 교회가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에 있어서 평신자들의 거룩한 생활과 유능한 활동을 기대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정치, 경제, 문화, 과학 등 모든 사회분야에서 가톨릭 신자들은 더 유능한 일꾼이 되어야하고 동시에 그들 자신의 생활과 그들이 종사하는 일들이 복음의 원리로써 운영되도록 부단한 연구와 실천이 있어야 하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초자연의 질서와 자연의 질서를 명백하게 구별하면서도 현세에서 양자의 조화가 보존되고, 자연질서가 초자연질서에 순응하도록 하는 올바른 신앙관을 가지고 활동해야 될 것이다.
「바티깐」 공의회의 정신을 구현하려는 현대교회의 「쇄신의 도정」은 길고도 험난한 것이다. 신자 개개인의 진정한 回心에서 교회의 제도상의 개선을 거쳐서 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세상과의 건설적인 대화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당면한 과제와 책임은 실로 막중하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한 인간의 잔꾀로써 이거창한 과업을 수행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세상을 이기신」 그리스도와 「교회의 영혼」이 성신과 함께 미력이나마 다하고저 대령하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최후만찬에서 주께서 하신 격려의 말씀으로 이 기나긴 서론을 마감하는 바이다.
『일어나 가자!』(요한 14·31) 「이상으로 鄭夏權 신부의 글은 끝나고 다음은 「典禮」에 관하여 성 베네딕또회원 白뿔라치도 신부가 수회에 걸쳐 집필합니다」
鄭夏權(解博·馬山중앙본당주임·本社論說委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