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의 모처럼의 부탁이어서 거절치 못하고 쓰지만 퍽 쑥스러운 이야기이다. 혹시나 나와 비슷한 경로로 뒤늦게 성소를 받을 사람이 있을지 몰라 참고삼아 써본다. 나는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기를 몹시 좋아했다. 그리하여 장차 화가가 되는 것이 나의 희망이었다.
제대로 「코스」를 밟자면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야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해야하지만(당시 한국엔 미술전문학교가 없었음)
경제가 허락지 않아 상업학교만 졸업하고 즉시 직장에 들어갔다. 퇴근후 밤시간을 이용해서 뎃상공부를 몇달 해보았으나 원색의 그림을 그릴 수도 없고 더구나 건강이 나빠져서 동경에 가서 고학으로 수업을 계속할 작정이었다.
한참 준비를 서두르고 있을 때 뜻밖에도 소신학교에 있는 아우가 폐결핵으로 각혈을 하고 오랜 시일 입원을 하게되니 치료비를 갚기 위해서도 동경에 가는 것을 포기하는 수 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하니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아는 천주님의 숨어있는 오묘한 섭리도 미쳐 깨닫지 못하고 병든 아우를 몹시 원망했다. 이제 미술은 포기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렇다고 예술의 길에서 온전히 떠나고 싶지는 않았다.,
본시 어려서부터 돈과 권세는 멸시하고 미워하는 편었지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의 세상이 어딘가 고결하고 보람있게 생각되어 예술을 할 작정이었다. 어떠한 예술을 할 것인지 천주님께서 알려주시기를 빈 결과 성음악을 연구하여 성가의 보급운동을 하는 것이 주님의 뜻인듯 여겨졌다.
그 당시 성직자로서 유일한 음악가인 변 신부님을 찾아갔다. 그 분 말씀이 『나이가 너무 많아서 기악에는 희망이 없으니 성악이나 해보라』는 것이었다. 그 즉시 성악교수를 찾아가 음성의 테스트를 하고 렛슨을 받기로 했다. 수업을 해가는 도중 성가의 보급운동 보다는 엉뚱하게 오페라에 더 취미가 있어 오페라 가수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장차 기회만 있으면 이태리에 유학할 계획이었다. 어느날 나의 은사인 장발 선생님께서 덕원 성분도 수도원을 소개해 주시면서 『너도 수도자가 될지 모르니까 해보라』는 권고였다. 나는 수도자가 될 뜻은 추호도 없이 서울 가톨릭합창단에 어울려 수도원 견학을 갔다.
그때에 받은 감격은 너무나도 큰 것이었다. 수도원의 조용하고도 평화로운 분위기며 수도자들의 명랑하고 인자한 모습이며 장엄미사의 경건하고도 성스러움이며 이 모든 것이 지상천국 같은 느낌이었다. 가 보니 수도자들은 뜻밖에도 맑고 밝은 표정이었으며 수도원 안팎이 고요한 평화로 감싸여 있는 듯 싶었다.
생후 평화를 실감한 것이 이때 처음이었다. 수도원에서 얻은 인상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날로 생생하여져서 마침내는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지금껏 뜻해온 오페라 가수로서의 호화로운 무대생활과 세속을 떠난 수도자로서의 평화로운 숨은 생활과 어느것이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인가?』하고 자문했다. 대답은 언제나 수도생활이었다. 그러나 자신이 없었다. 그리하여 명동성당 순교복자제대 앞에 가서 조용히 기구를 올렸다. 『주여 만일 쉽게 수도생활을 할 수 있게 이끌어 주시면 저는 수도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이런 기구를 하고도 즉시 후회가 되었으니 참으로 수도성소를 받을가 싶어 겁이 났기 때문이다. 이런 얄미운 기구를 두번했다.
나는 그만큼 세속에 미련이 컸던 모양이다. 그러던중 일본의 유명한 이와시다 신부님의 「추도호」 잡지를 일겍 되었다. 그분의 일생이 너무도 위대했기 때문에 나는 큰 자극을 받았다. 이 신부님은 관서지방 굴지의 재벌의 가문에서 태어나 동경제국대학 철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천재였다. 그는 런던에 가서 유학을 하고 돌아 올 때는 수단을 입은 신부였던 것이다.
일생을 문필의 전교와 나환자를 돌보다가 돌아가신 분이다. 이런 훌륭한 분이 세속을 쉽게 버리고 사제 성소를 받았는데 나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또 한편 생각할 때 정치에 무지해서 그렇겠지만 해외에 임시정부가 있는 것을 전혀 알지도 못하고 그 당시 창씨며 학도병이며 하고 떠들어 대는 판국이어서 조국은 완전히 일본에게 먹힌 것으로 생각하고 조국의 장래를 위해서 예술에 더 정진할 용기를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제가 되어 동포이 영혼을 구하는 것이 더 애국하는 길이요 훨씬 보람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또 그 당시 우리 또래의 젊은이들에게는 좀더 교양과 시대감각이 있고 서민적이며 젊은이를 이해해 주는 성직자가 적음이 안타까웠다. 다시 말해서 윤리 신학서나 교회법전을 펴놓고 신자들을 호령하는 신부 보다는 환경에 지배되고 움직이는 사람들과 함게 슬프하고 즐거워하는 신부가 아쉬웠던 것이다.
주제넘게도 내 자신이 그러한 신부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이 없었다. 어느날 예수성심께 우리 가정을 봉헌하는 예식을 올릴 때 갑자기 사제가 될 수 있는 자신을 얻었던 것이다. 그후 본당신부님이 지도를 6개월 받고 수도원에 들어갔으며 12년후에 사제의 서품을 받았다. 나이 36세에.
金永根 신부(성베네딕도회 회원. 김천 평화동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