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뜻으로는 성세도 성소의 한가지이긴 하나 가정과 속세를 떠날 수 없을뿐만 아니라 오히려 가정과 속세 안에 자기의 본분이 있지마는 사제 성소와 수도자 성소에서는 자기자신 마저 버리고 그야말로 완전히 無我를 실천한다.
인간적으로 볼 때 이것은 매우 행하기가 쉽지 않다. 진복팔단의 첫 조목이 마음으로 가난하기다. 우리는 물질적으로는 얼마든지 가난할 수 있으나 마음속에는 항상 「자기」를 所有하고 있다.
이 「자기」 안에는 분심 잡념 교만 분노가 깊이 도사리고 있다. 자식이 성소를 받았을 때 자는 무정하게 생각할지도 모르나 「너의 어버이」까지도 버리라고 당부했다. 그러나 나의 자녀들 가 운데 제일 어버이를 알뜰히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성소자인 자식이다. 다른 자식들은 어버이의 건강이나 의식 걱정을 해주지마는 성소자 자식은 어버이의 영혼걱정을 해주고 또 기구해주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도 나의 영성생활은 어떠한가? 예로부터 나아를 위해 출정한 무사의 어버이나 처자는 무사 못지않게 의젓하라는 것인데 나는 성소자이 어버이로서 부끄러운 점은 없는가? 사실 있도고 남음을 고백 아니할 수 없다
수도생활이나 세속생활이나 淨化, 明化를 거쳐 「님」과이 一化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런데 나의 淨化는 어느정도인가? 부패와 구악에 사로 잡히기가 일수가 아닌가! 만일 나의 이 기막히는 실정을 성소자 자식이 안다면 그 얼마나 상심할 것인가! 이러한 반성은 확실히 성소자 자식을 둔 어머지의 정신을 차리게 한다. 그래서 나는 성소자 자식이 있는 보람을 느낀다. 반면에나는 두렵기도 하다. 왜냐하면 천사도 반역했고 사도도 배은했고 주교도 이단에 떨어지지 않았던가?
설마 내 자식이 그럴리가 있겠는가 하는 안심은 도무지 하지 말 것 같다. 특히 그 아이는 성소생활의 첫 걸음을 디디었을 뿐으로 완성에는 아직도 차례가 멀었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를 위해 기구를 게을리 해서는 아니된다. 나의 영성생활을 누구보다 걱정해 주는 성소자 자식에게 갚는 길은 내가 그 아이의 섬소 완성을 위해 기구하는 것 뿐이다. 성직자들 수도자들 특히 봉쇄 안의 얼굴도 모르는 수도자들이 천하 만민을 위해 기구하고 있음을 나는 잘 안다.
그 많은 이름 모르는 수도자들 가운데 내가 잘 아는 나의 자식이 나를 위해 기구하고 있음을 또한 잘 안다. 따라서 나의 통회의 눈물은 더욱 뜨거워 짐을 느낀다. 천주께서 나의 자식을 부르셨음은 물론 당신의 연장을 삼으시고자 하심이나 당신의 섭리에는 나의 聖化도 포함되어 있느니만큼 바로 나 자신을 위하심이라고 나는 감히 생각하고 싶다.
극악 중죄인의 잘 가르치지도 못한 자식들 가운데서 하나만에게라도 성소를 내리신 천주의 홍은을 나는 어떻게 해야 보답할 수 있을까!
자제가 명하는 보속을 되풀이 해도 후련할 수 없는 구악의 가책! 성소자의 어버이로서 나는 천주대전에 황송하기만 하다.
그 아이의 성소생활 시작을 위해 너그러이 또 인자로이 지도해 주신 靈導師 신부님, 會의 어른들, 그리고 선배들, 동료들에게 충심으로 감사를 드리고 싶다.
金益鎭(文筆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