夜話(야화) (1) <第一話(제1화)> 나를 만나보시려면 ①
발행일1968-02-18 [제606호, 4면]
『내가 이렇게도 은희(恩姬)를 뜨겁게 사랑했었던가?』
승재(承재)는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차거운 미소가 떠올랐다.
『후우…』
하고 그는 후꾼하는 술냄새와 함께 마음속에 검은 구름처럼 끼어있는 울분을 토하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마음 샅샅이 결어 붙은 울분은 술기운을 빌려서 맹렬히 솟아오르고 있었다. 명동 술집에서 나올때 이미 열한시가 넘었었으니 아마 자정이 머지않았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매우 한적하다. 이따금 빠른 걸음으로 행인들이 지나간다. 입춘이 지났다고 하지마는 아직도 겨울의 위세는 끄떡도 없다. 시커먼 산마루에서 밀어닥치는 바람은 뼛속까지 저려드는 것 같다. 그러나 승재는 조금도 추위를 느끼지 않았다.
『후우…』
그는 자꾸만 빗놓이는 다리를 가누며 조금이라도 가슴속에 타오르는 불길한 울분을 덜어보려고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타오르는 울분은 덜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더 활활 타오른다.
『은희는 너무 해. 으은희는 너 너무 해…』
그는 혀꼬부라진 소리로 또 중얼거려 보았다. 그러자 울분은 갑자기 알지 못할 분노로 변한다.
『제길 할것』
그는 발로 차는 시늉을 해 본다. 무엇이고 한번걷어 차기라도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심정이었다. 그러자
『앗!』
하고 앞에 와서 무엇이 부딛친다. 그 서술에 승재는 보기 좋게 땅에 나둥그러졌다.
『이놈아 눈깔이 없어?』
자전거를 타고 가던 사람이 쓰러질번 하다가 자전거만 동댕이를 치고 겨우 일어서며 욕을 퍼부었다.
『아이구!』
승재는 자기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술기운이 함빡 내솟아서 쓰러져 가지고도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다. 그 꼴을 보고 자전거 탄 사람은 자전거핸들을 바로 잡아 가지고는 다시 타고 그대로 따라르릉 따르릉 달려가 버리었다.
『어떤놈이냐? 사람을 함부로 받아 넘기는 놈이…』
승재는 그제서야 고함을 쳐 보았으나 거기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 그는 일어서서 겨우 몸을 가누어 걷기 시작했다. 큰길에서 골 목으로 들어서서 한참을 걸었을때 언덕 위에 집이 있고 거기 쳐다보이는 창문에 불이 켜져 있었다. 아물아물한 가운데도 승재는 그 불빛과 창문을 똑똑히 보았다.
『은희 너무 해 으 은희 당신은 너 너무했어…』
승재는 이렇게 또 중얼 거렸으나 그 목소리는 중얼거림이 아니라 마음 밑바닥에서 울려오는 절박한 부르짖음이었다.
『은희, 이렇게 남을 골탕을 먹이고 자기만 그렇게 훌쩍 가버리면 나는 그래 어떻게 하라는 거지?』
승재는 언덕위의 창문을 흘겨보며 길위의 돌을 힘껏 걷어찼다. 그러자 그는 하마터면 쓰러질번 하는 것을 마침 전기선대에 기대어 겨우 몸을 가누었다. 화가 자꾸만 치민다. 그러나 어떻게 하는 도리가 없었다. 은희는 이미 죽었다. 죽은 사람에게 아무리 시비를 걸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마치 허공을 휘어잡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일은 크게 벌어졌지만 그런 일이 어째서 일어났는지 까닭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런 생각이 승재의 분노를 돋구는지도 모른다. 정신을 가다듬어서 승재는 언덕길을 올라갔다.
『은희!』
여기까지 올라오면 어디서 보았는지 은희가 내달아서 부축을 해 주었었다.
『글쎄 웹 술을 또 그렇게 많이 하셨어요. 그러다가 실수나 하면 어떻게 하시려고…』
은희는 별로 화도 내지 않고 승재를 부축하여 집으르 데리고 들어갔다. 이런때 승재의 귀에 은희의 가냘픈 목소리는 어렸을때 엄마의 자장가 처럼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나 지금은 언덕길이 텅 비어있다. 그 은희는 집에 없는 것이다. 아니 집에뿐아니라 이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아라스카를 가도 아프리카를 가도 은희는 없다. 망우리에 승재 자신이 꽝꽝 묻고 오지않았는가. 그게 벌써 석달전 일이 아닌가. 지금 와서 은희가 언덕길 위에 내달을리가 없는 일이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가? 모른다. 갑자기 들이닥치는 폭풍우처럼 승재에게 크나큰 비극이 휘몰아 온 것이다. 에잇! 빌어먹을….
집 앞에 이르러 승재는 발로 대문을 보기 좋게 걷어 왔다, 꽝하고 대문이 요란스럽게 울린다.
『이건 내 집이다. 내 소유이니까 내 마음대로 한들 누가 뭐랄 것인가』
승재는 또 한 번 힘껏 대문을 걷어 찼
『문 열어라. 문열어!』
누군가 기다렸다는 듯이 허둥지둥 나와서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승재가 술이 몹시 취한걸 보고 그대로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뭐야? 내가 호랑이로라도 보이는 건가, 왜 달아나기는 달아나는 거야?』
승재는 소리를 지르고는 그대로 대문안에 주저앉았다.
『거기 달아나는게 누구야? 도대체 누구냔 말야?』
주저앉은채 승재가 소리치는것을 보고 안으로 들어가려던 사람이 멈칫 멈칫 다시 나왔다. 정욱(貞玉)이었다.
『일어나세요. 옷에 흙물어요』
정옥은 덤벼들어서 승재를 일으키려고 한다.
『비켜! 저리 비켜! 누가 함부로 남의 몸에 손을 대는거야.』
승재는 정옥을 뿌리치고 비쓸비쓸 일어섰다.
『아니 이 애가 어디서 또 이렇게 술을 고주망태가 되게 먹었어. 술취한 미치광이라니 순녀네는 방으로 들어가게. 내가 데리고 들어갈테니…』
안방에서 늙은 여인이 나와서 승재를 일으키었다. 승재의 누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