現代 크리스챤들은 地獄에 대해서 별로 생각지 않거나 그 存在를 믿지않은 것처럼 行動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地獄은 신앙 개조의 敎理로서 믿기를 거부하는 자는 그리스도 信者가 될 수 없다.
또 설령 地獄이 우리에게 不快한 感을 준다고 해서 이 啓示眞理를 없애버릴 아무런 근거도 우리에게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성경책을 들고 보기만 하면 예수께서 얼마나 여러번 地獄에 대해서 강조하셨고 또 우리 自由로 선택한 행동의 결과에 대하여 얼마나 力說하였는지 잘 볼 수가 있다.
그러나 그동안 說敎者들은 이 題目에 대하여 많은 때 함부로 다루거나 잘못 해석해서 地獄을 믿는데 失望케 했다고 아니할 수 없다.
먼저 천주는 地獄을 創造하시지 않았다. 人間을 형벌하는 場所, 괴로움의 世界 당신 원수들을 복수하는 악마의 世界를 倉曹하지 않으셨다. 철학적으로 말하면 惡은 善의 결함이다. 천주는 惡을 創造하지 않으셨으니 천주 創造하신 것은 무엇이고다 좋은 것이다. 그런데 地獄은 惡으로 꽉 찬 것이니까 創造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地獄은 무엇보다 먼저 어떤 場所가 아니고 오직 마음의 狀態이고 天國과 같이 靈神的인 것이다.
우리가 숨을 쉬기 위해서 절대로 空氣가 必要함과 같이 또 공기가 없어지면 질식하는 바와 같이 地獄은 天主를 必要로 하는 영혼의 狀態이다.
다음으로 범하기 쉬운 둘째 오류는 人間을 벌하는 이는 天主가 아니고 오직 人間 스스로 자기를 벌하는 것이다. 天主는 당신 創造하신 것은 다 사랑하신다.
시밎어 저주받은 자까지도 造物로서 사랑하신다. 저주 받은 자들은 스스로 天主의 사랑을 拒否하고 自己自身을 벌하는 것이다. 마치 山 위에 있는 집 한채가 四方周圍에는 온전히 햇빛이 뒤 덮엿을지라도 그 안에 있는 사람은 햇빛을 받기 싫어서 집 문을 꼭꼭 쳐 닫고 덧문과 걸창을 닫아 캄캄한 가운데 쳐박혀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光明한 빛은 地獄의 暗黑 속도 비치지만 그 暗黑이 빛을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것이다. 따라서 天主께서 人間을 地獄으로 내쫓거나 떠 민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만일 天主께서 人間의 自由를 無視하고 모든 사람들을 强制로 救援시켰다면 그 天國은 마치 集合 收容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天主는 어떤 사람에게도 당신을 사랑하라고 强要도 하지 않으시고 또 당신을 사랑하고 願하는 者를 拒絶도 하지 않으신다. 要는 各 사람은 永遠히 自己가 가고싶은대로 스스로 가는 것이다.
사람이 있는 곳에 마음이 가고 自己財物이 있는 곳에 마음과 肉身과 靈魂이 있는 것이다.
天主와 地獄은 벌써 우리를 위해서 시작된 것이고, 우리 마음 가운데 現在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마음 밖에는 絶對로 存在하지 않는다.
우리가 世上 사는 동안 天主의 착하심과 사랑하심과 現在 하시는 가운데서도 아무런 즐거움을 느끼지 못했다면 저세상에 가서도 즐거움을 찾아보지 못할 것이고 이 세상에서 天主와 萬物과 親舊와 또 忠實하고 관대한 사랑이 우리에게 無味건조했다면 저 세상에 가서도 무미건조할 것이다.
만일 그들이 이 세상의 무미건조한 상태에 있다가 어떻게 천당에 가게된다면 이는 마치 암소 한마리가 성당 안에서 방황하듯이 어리둥벌할 것이고 또 귀머거리가 音樂會에 나가서 다른 사람이 즐거워 하는 것을 보고 自己도 즐거워 하려고 헛되니 手苦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世上에서 미리 천국 맛을 참으로 맛보지 못했다면 우리는 永遠히 천국맛을 보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存在하는 것 主日미사 참례하는 것 우리 주 위에 敎友들이 있는 것 등은 다 우리가 天主와 兄弟들과 한가지로 지내는 것이 좋은지 싫은지를 實驗하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고 天國을 사모하는지 안하는지 實驗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우리가 天主께 尊敬心을 가질때 希望과 依託心이 充滿할 때 열심이 복바쳐 기도할 때 어려운 일이 잘 해결되어 즐거움을 맛볼 때 또는 大罪를 犯하여 良心이 苛責되었다가 告解聖事를 잘 보았을 때의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것 등은 벌써 얼마쯤 天國을 누리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自己 스스로 기분이 나쁠 때 남과의 관계에 있어 마음이 무척 상했을 때 무슨 處事에 不滿이 있을 때 원수 갚을 마음이 强할 때 사랑과 同情이 말랐을 때 등은 어느정도 地獄을 맛보는 것이다.
그러나 한가지 사랑의 운동, 참회의 움빅임 용서하겠다는 決心 하나로 直時 地獄은 끝나는 것이다.
罪中에 있으면서 참회하기를 싫어하며 苦生하는 것도 地獄이다. 自己外의 모든 사람에게 責任을 전가하는 態度나 잘못하고서도 自白하거나 용서를 請하지 않을 만큼 교만한 것도 地獄이다.
地獄은 온전히 스스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다른 사람의 協力을 必要치 않는 嚴格히 말해서 個人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天國은 여러사람과 함께 사는 것이고 地獄은 모든 사람을 악마처럼 보고 自己도 그안에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人間은 原因과 理由를 確實히 알면서 地獄을 택하는 것이다. 地獄에 가는 사람이 많은가?
아무도 모른다. 가고 안가는 것은 오로지 우리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가톨릭은 어떤 사람이 天國에 갓다고 正式으로 宣言하거나 聖人 반열에 올리는 權限을 가졌어도 누가 地獄에 갔다고 宣言할 權限을 바지않고 또 무가 地獄에 갔다고 믿으라고 권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하는 남을 사랑할 수 있다면 다 救援받을 可能性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天主는 永遠으로부터 우리 기도를 미리 보시기 때문이다.
天主는 오늘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나 來日 기도할 것이나 다 記憶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비록 기도없이 갑자기 죽을지라도 기도의 效果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 自殺했다고 해서 救援받지 못했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가 救援될 수 있는 力量은 남을 사랑하고 奉仕하는 마음이 얼마나 많고 적음에 달려 있는 것이다.
聖敎會는 每日 미사때마다 全世界의 救援을 爲하여 기도한다. 이것이 기도의 目的이고 交會의 希望이다.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은 어떠한 사람의 滅亡도 보고만 있을 수 없다. 우리의 奉仕는 모든 사람이 아직도 救援받을 수 있는 것이다.
L. 브리
金二煥 譯(群山 月明洞 주임神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