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文學(문학)과 問題意識(문제의식) 第(제)5回(회) (完)
人間實存(인간실존) 描寫(묘사)만 아닌 人間完成(인간완성)에의 指針(지침) 돼야
認識(인식)의 命題(명제) 아닌 살아있는 人間(인간)문제
藝術(예술) 곧 倫理(윤리) 아니나 作家(작가), 항상 自己完成(자기완성)에의 道程(도정)에 있어
그리스도的(적) 고뇌 · 투쟁만이 勝利(승리) 期待(기대)돼
이제 마금으로 그러면 가톨릭문학자들은 왜 저와같은 주제넘으리만큼 거창한 문제의식을 안고 고민하고 있는가? 여기에 몇마디 덧붙여 두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작가들은 신학자나 철학자들과 같은 인식의 명제(命題)로서가 아니라 한마디로 말하면 생명이 있는 즉 살아있는 인간을 그려야 되기 때문이다.
작가들이 인간의 가장 내부 속을 들여다 볼 때 인간의 무한한 모순과 분열과 대립을 통찰 안할 수 없으며 그 영혼 속에 이밀이 작용하고 있는 성총의 세계는 물론 죄와 악의 세계도 직시(直視) 안할 수가 없다. 이때 작가는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죄나 악에 고통하고 있는 인간에게 가엾은 생각 즉 연민을 느끼게 되고 또 공감마저 일으키지 않고서는 그를 그릴 수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제자(弟子)를 쓴 부르제를 비롯한 수많은 호교문학(護敎文學)자들처럼 인간을 이념의 꼭두각시를 만들기 십상인 것이다. 이것은 아무리 잘 맞춰서 그려놓았더래도 문학의 타락이요, 참된 예술은 아니다.
그러면 작가는 제 마음대로 제 그리고픈 대로 죄나 악의 세계를 잘만 그려서 예술적 감동만 주면 그만인가 하니 가톨릭 작가의 경우는 그렇지도 못하다. 즉 그 자신이 죄악의 세례를 헤매면서(그리면서)도 동시에 신자로서 그 죄에 물들지 않아야 하는 의무가 있으며 또한 동시에 독자들을 죄악에 빠지게 해서는 안된다는 두려운 책임이 있다.
이러한 문제를 현존한 가톨릭의 석학(碩學) 쟈크 마리땡 박사는 『예술은 그 자체가 현덕(賢德)이나 예지에 속하지 않지만 그 주체(作家) 속에 있어서는 예술은 그의 완성(完成)에 종속(從屬)된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예쑬은 윤리적인 의무가 없지만 그 작가는 자기완성의 윤리적인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이에 대하여 정면의 반대라기 보다 작가의 고충을 프랑소아 모리약은 다음과 같이 솔직히 털어놓는다.
『높은 곳(거룩한 마음으로-筆者 註)에서 죄에 떨어진 피조물을 그릴 수는 없다. 그들(作中人物-筆者 註)이 작가보다 더 강한 힘을 가져야만 그들은 처음으로 산인물이 된다. 작가는 작품 속의 인물을 마음대로(筆者追記) 이끌 수는 없다. 만일 그렇게 되면 작가는 작중인물에 대해 비판과 간섭이 생겨, 이래서는 그 작품을 실패한다. 가령 성인이 된다면 몰라도, 그러나 그때는(성인이 된 때 - 筆者 追註) 소설은 쓰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이어서 『나는 소설가다. 가톨릭이다. 여기세 나의 싸움이 있다』곻 잠언(箴言) 같은 말을 남긴다.
이러한 모든 가톨릭작가의 문제의식과 고민들은 필경,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의 오뇌(懊惱)와 고통, 즉 천주 친히 우리 앞에 체현(體現)하신 수고수난을 우리 역시 따르는 것이라 하겠다. 실상 우리는 싸우지 않고 저러한 고통 없이 예수의 제자가 도리 수는 없다.
더욱이나 그 승리와 보상(報償)을 기대할 수는 없다. 흔히 우리는 얼마나 많이 부전승(不戰勝)을 이룬 듯한 구역질 나는 기독교인의 얼굴을 대하는가! 가톨릭작가들에게 있어 아니 참된 작가라면 저러한 모순과 갈등은 언제나 그를 괴롭힐 것이다. 그리고 신앙과 자기 성실의 파열(破裂) 속에 언제나 살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어쩌면 이 비극적인 함정에 기꺼히 몸을 내던지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러한 심연(深淵)에의 무아의 투기(無我의 投機)야말로 승리, 곧 부활을 가져다 주는 것이리라. - 끝 -
■ 筆者의 詩 - 聖母像 앞에서
은방울 꽃에서는 聖母의 냄새가 난다.
地球위에 또아리를 틀고 엎드려
당신 맨발에 깔린 배암은
아프기거켠 고개를 갸웃둥
눈을 가늘게 뜨고
조을고 있다
푸른 보리 비린내를 풍기고
지나가는 어린 바람이
당신의 흰 못자락과
남빛디를 살짝 날리고
흰수건을 쓴채 우러른
당신의 눈빛엔
恨이 끼어 있다.
高麗의 푸른 하늘을 넘어
저 깊은 虛無의 바다도 넘어서
당신의 明紬 가슴에다
七苦의 상채기를 내고간
아들, 예수이 나라가 보이는가?
콩크리트로 만들어 놓은
루르드 바위 그늘에
호미를 놓고 무릎을 꿇은
農夫의 合掌!
5月의 午後
萬物의 숨결이
고르다
具常(詩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