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年(년)에 韓國敎會(한국교회)가 해야할 時急(시급)한 일 (10)
資本橫暴(자본횡포)와 對決(대결)
땅에 떨어진 人間(인간)의 價値(가치)
最後堡壘(최후보루), 참 宗敎(종교)의 證人(증인)
발행일1967-04-23 [제565호, 1면]
救靈事業이라고 입으로만 힘 안들이고 말할게 아니라 그 말의 核心을 檢討해 보아야 하지 않을가? 靈이란 精神을 가리키는 말이니 더욱 손쉽게 말하면 마음이다. 그러므로 救靈事業을 하려면 對象의 精神 즉 마음을 휘어 잡아야 할 것이고 휘어잡는 것만으로는 不足해서 그 마음 한복판으로 파고 들어가야 한다. 主 예수께서 十字架에 釘死하신 참 目的은 무엇인가. 완악한 人間의 마음 한복판으로 들어가시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敎會가 우선 해야할 일은 射擊의 焦點을 잡는 일이다. 사람의 마음을 잡으려면 그 사람의 身邊事情과 關心事를 理解해야 한다. 그러한 낱낱의 마음이 合쳐서 흐르는 큰 물결이 時代의 潮流이다. 그러므로 한 時代를 휘어잡고 그 복판으로 들어가려며는 그 時代의 課題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할 것은 自明한 일이다. 그러면 現代의 人間課題는 어디에 있는가? 人間들은 오늘날 대체 무엇때문에 울고 함숨 짓고 부르짖고 몸부림 치고 있는가? 그리하여 聖堂의 門을 두드리는 罪많은 한 羊은 마음 가운데 어떤 悲哀를 품고 敎會의 仁慈하고 부드러운 손으로 어루만져 慰撫 받기를 渴望하고 있는가? 이것은 가장 根本的이며 重大한 일이 아닐 수 없다. 傷處 투성이의 靈魂들을 眞理와 平和의 甲板으로 끌어올리는 作業에 있어서 이보다 더 重大한 情報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現代의 가장 큰 人間課題는 무엇인가? 그것은 人間價値의 墮落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가? 지금 우리나라에 있어서는 어떠한가? 人間 「인프레」로 넘쳐 흐르는 사람의 무리들이 길로 公園으로 市場周邊으로 3流劇場 언저리로 社會문앞으로 누렇게 뜬 얼굴들을 하고 날마다 방황하고 있다. 이들은 外國軍部隊 쓰레기 보다도 훨씬 값이 떨어지고 사람들의 關心이 稀薄하다. 굶주린 餓鬼떼와도 같은 이 무리들은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얻어 맞고 발길에 채이고 자빠지고 엎드러지며 하늘을 우러러 號哭한다. 그러나 누구 하나 그들을 어루만져 위로하는 사람은 없다. 모든 것은 經濟原則에 依해서 處理되고 運營될 뿐이다. 數가 많으면 값이 싸지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市場經濟의 原理이다. 따라서 이들은 가장 헐값에 賣買되는 商品이다. 이런 傾向은 資本의 교만과 橫暴에 따라야 할 義務와 責任을 妄却하고 尊貴한 人間生命을 物質인 資本의 무게로 壓死시키려고 한다.
『그 이상은 한푼도 줄 수 없다. 싫으면 그만 두려무나. 이력서는 산더미처럼 쌓여있지 않은가.』
이것이 이 時代 企業主들의 거의 全部의 속셈이다. 무서운 일이다. 이런 조그만 利己心의 惡魔가 集團을 이루고 努力을 이루어 온 世界를 支配함으로써 저 무서운 世紀的 혼란을 빚어 내었다.
즉, 소름끼치는 두개 世界의 決死的 對決이 아닌가. 現代는 産業革命 以後 人間이 눈부신 機械文明과 거기 따르는 物質의 富를 獲得했지마는 바로 그 物質의 富를 둘러싸고 未曾有의 破綻에 빠진 時代이다. 물질이 人間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人間이 물질에 예속된 時代이다. 이런 奇怪한 삶을 天主께서는 어떻게 보실 것인가?
經濟的原理는 무엇이라 하든지 人間은 商品이 아니다. 한 초라하고 보잘것 없는 사람이 옆구리에 도시락 넣은 가방을 끼고 職場으로 나간다. 비록 값싼 月給쟁이 淺薄한 人物이지마는 우리는 決코 그를 업신여기고 忽待해서는 안된다. 그는 버젓한 生命體이다.
그에게도 그런대로 人格이 있고 思考가 있고 趣味가 있고 理想이 있고 神秘가 있고 꿈이 있다. 그의 꿈이 비록 하치 않은 양복 한벌 구두 한켜레에 응결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決코 그것을 웃을 수는 없다. 그는 尊貴한 한 生命體이기 때문이다. 어디 또 그뿐인가. 그에게는 食率이 딸려 있다. 그의 값싸게 처리되는 運命의 背後에는 老父母와 妻子兄弟의 生命이 달려있다. 이러한 人物이 數千數億의 集團을 이룰 때 거기 흐르는 人間生命의 거대한 흐름 그것이 곧 한 時代이지 별것이란 말인가.
現代에 이르러 歷代 敎宗께서 敎書를 通하여 提唱하신 것은 世界勞動層의 生活向上과 權益擁護이었다는 것은 그대로 심상히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잘되었던 못되었던 現代人類에게는 이것이 가장 큰 課題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現代人은 피로하다. 우울하다. 孤獨하다. 서럽다. 술을 먹고 통고한다. 感官世界에 陶醉한다. 이것은 모두가 마음에 큰 空虛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람은 힘과 勇氣가 必要하다. 부드러운 慰撫가 必要하다. 그들은 어디로 갈 것이며 누구에게 慰撫를 받을 것인가? 여기에 우리 敎會의 使命이 있지 않을가? 그들은 物質에 시달리었다. 그러므로 많은 物質보다도 이 세상은 物質 以上의 存在에 의하여 움직이고 있다는 事實을 알고 싶어한다.
즉, 敎會를 通하여 天主의 存在를 느끼고 싶어하는 것이다. 聖職者나 平信徒나 修道者나 다 함께 이 重大한 事實을 저버리지 않고 實踐하기를 이 時代는 强力히 要求하고 있느 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