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C 開局(개국) 6周年(주년) 紀念(기념) 當選作(당선작)]『새남터의 북소리』放送(방송)을 끝내고
李朝(이조) 封建倫理(봉건윤리)에 죽음으로 항거한 세 女性像(녀성상)발견
文學以前(문학이전)의 宗教的(종교적)인 感銘(감명)받고
通學(통학)길목「새남터 殉敎碑(순교비)」보고 그 時節(시절)을 想像(상상)해
1839년(己亥年)이 나라에서 일어난 천주교박해와 수난은 나에게 殉敎劇을 쓰도록 큰 충동을 준 감격의 시대였다.
그 半世紀후 大院君시대에 더 참혹한 박해가 있었지만 최초로 서양신부님들이 이땅에서 순교하신 己亥박해 때를 나는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새남터의 북소리」도 그 당시 이야기다. 내가 「새남터」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벌써 여러해 전이다.
대학에 입학하고 처음 한달동안은 天安에서 서울까지 통학한적이 있었다.
현재는 거대한 「아파트」 村으로 변모했지만 이삼년 전까지만 해도 게딱지 같은 지저분한 빈민굴로 꽉 메워져있던 二村洞 복판으로 철로가 지나가는데 「새남터」(殉敎지)는 바로 그 철로 연변에 서있다.
나는 한달동안 매일 순교비가 서있는 새남터를 보면서 통학했다.
천진난만한 유치원 어린이들이 뛰어놀기도 하고 어떤때는 수녀혼자 서있기도 한 평화로운 새남터를 보면서 옛날의 새남터광경을 상상해보곤 했다.
칼춤추는 험상궂은 망나니들, 목을 잘리는 순교자들 야유를 하며 아우성치는 구경꾼들….
글을 써보겠다는 20세의 문학도이던 나는 문학이전의 숭고한 무엇을 새남터에서 느끼곤 했다.
신라의 이차돈은 자기한 생명을 바쳐 한반도에 찬란한 佛敎文化를 꽃피게 한 밑걸음으로 역사에서 높이 평가받는데 무수한 피를 뿌리고 사라진 천주교의 순교자들은 어째서 많은 사람들한테 망각된 존재로 묻혀있는가!
어떤 안타까움이 젊은 내가슴에 일어났다.
나는 서점에 가서 우리나라 순교사에 관한 책을 찾아보았다. 의외로 그 방면에 관한 책이 없음에 실망했다.
柳洪烈 교수의 「한국천주교회사」가 있을뿐 너무도 빈약한 중에서 단한권 「七九位殉敎福者傳」을 발견했다.
그 책을 단숨에 다 읽고 나는 커다란 감동에 그날 밤은 잠조차 제대로 이를 수가 없었다.
그 속에 기록된 순교자들은 얼마나 거룩하고 얼마나 아름다운 별들인가!
역사의 폐지를 장식한 무수한 인물들 속에서 반짝이는 이름없는 별들이다.
그러나 이름없는 별들이 나에게는 더큰 감동을 주었고 매력을 갖게 하였다.
특히 내가 놀라워한 것은 여성 순교자들이다.
李朝 5백년은 이나라 여성들에게 암흑의 시대였다. 三從之義, 七去之惡같은 가혹하고 고루한 유교의 윤리에 얽매이어 폐쇄된 그늘 속의 삶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 사회에서 애띈 처녀들과 늙은 할머니들이 새 서양의 종교를 믿은 것만도 놀라운 일인데 자기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참혹 한 형벌과 온갖 모멸과 유혹에도 꺾이지 않고 죽음으로 저항한 사실은 젊은 나에게 우리나라 민족성과 여성관 조차 새롭게 갖도록 해주었다. 작품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떠올랐다.
그러나 한 시대를 배경으로 동서문화의 역사적 충돌이기도 한 순교작품을 쓰기엔 내가 너무 어렸고 비종교인인 나는 종교에 무식했다.
감히 손도 못대보고 군에 입대했다. 군에서 나온 후엔 「드라마」를 쓰겠다고 생각했으므로 더욱 기회가 없었다.
솔직히 대중적인 방송극으로서는 심각한 종교이야기를 쓰기엔 많은 제약을 받지 않을 수 없다.
햇병아리 작가를 벗어나려고 지난 가을 문화방송 개국 6주년기념작품모집에 다시 응모했다. 시대물이란 「핸디캡」을 느끼면서도 이번엔 약간의 모험으로 천주교순교 이야기를 쓴 것이 요행 당선작으로 뽑혀 1월(지방은 2월) 한달동안 방송으로 나갔다.
하지만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한마디도 그 작품에서 못한 아쉬움이 크다. 순교자들의 거룩한 뜻과 발자취를 어찌 일편린이나마 알고 썼겠는가.
이제 연속방송극 「새남터의 북소리」는 흘러간 전파와 함께 우리의 공간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백여년 전 새남터에서 울렸던 그 북소리는 위대한 한국천주교 순교자들의 목소리와 더불어 영원히 우리들의 귓가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朴濤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