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종교문제연구소가 서울서 주최하여 20일부터 22일까지 계속된 「바티깐 공의회 신학강좌」에서 강연요지를 필자들이 요약한 것이다.(編輯者註)
■ 敎會憲章, 教令의 核心, 救人…敎會存在 意義
◇敎會憲章 개설 / <강사 朴養雲 신부(종교문제연구원장)>
요한 23세는 그가 교황이 되자마자 가톨릭교회 내에 쇄신의 새 바람을 불어넣기 위하여 교회의 창문과 철문을 열고 세계와 타교파인과의 대화를 제창하였다. 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열린 종교회의가 제2차 「바티깐」 공의회였다. 공의회 초기에 마련된 의안은 무려 73건이나 되었으나 그것이 4년간의 회의를 거쳐 16개 결의문으로 집약된 것이다.
그 16개 결의문 중에서도 교회헌장은 가장 중요하고 핵심이 되는 문헌으로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청사진의 역할을 한 것이다. 신학자 바라오나는 『교회헌장은 가톨릭과 그리스도교 공동체에 새로운 피를 주입하는 문헌』이라고 평하기까지 하였다.
이 헌장이 제시하는 새로운 교회상은 대개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교회는 인류구원을 위하여 마련된 구세의 성사(성례)다. 죄악과 고통으로 신음하는 인류에게 구원의 성약(聖藥)과 치료의 성법(聖法)을 그리스도가 마련하고 그를 교회에 넘겨주셨다. 그래서 교회는 인류구원에 필요한 모든 방법을 소유하는 만큼 구세의 성사라고 할 수 있다. 이 성사(성례)는 오늘 성당과 예배당에 나가면서 그리스도를 믿는 크리스찬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아직 믿지 않는 외교인들을 위해서도 마련된 만큼 만인에게 공개되어야 마땅한 성례이다.
▲교회는 「하느님의 백성」이다. 교회에 대한 정의가 신학적으로 수다하지만 「하느님의 백성」만큼 교회의 본질을 드러내는 정의는 없다고 본다. 신·구약 성경에 뒷받침을 받는 성서적 표현으로 교회를 정의한 것이 「하느님의 백성」이다. 일찌기 「하느님」은 「메시아」의 왕국을 예언하시면서 「하느님의 이스라엘」이란 말씀을 여러번 사용하셨고 더욱이 신약성서에는 다음과 같이 「하느님의 백성」이 교회라고 명확히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택함을 받은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국민이요, 하느님의 소유자가 된 백성입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나 지금은 그의 백성이요, 전에는 자비함을 받지 못한 자였으나 지금은 자비함을 받은 자입니다』(베드로전서 2장 9·10절)
▲만인이 「하느님의 백성」 안에 속하기 때문에 성적계급과 평신자간의 사이는 크게 좁혀지는 것이다. 평신자는 그가 받은 성세와 견진성사로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기 때문에 비록 사제들이 신품성사로 받는 사제직과는 차이점이 있지만 공통사제직을 형성하는 것이다. 「바티깐」 공의회는 가톨릭교회의 종전의 성직「피라밑」을 무너뜨리고 성직계급과 평신자사이의 간격을 축소시키는데 큰 성과를 거두었다.
■ 公議會…絶望을 解消 個人主義 排擊 人間完成 世上에서 趙牧師 敎會는 하나 돼야
◇公議會 神學에 나타난 人間像 / <강사 鄭義採 신부(가톨릭大副學長)>
인간은 인간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커다란 신비에 가로놓여 있다. 크리스찬은 계시로부터 이를 해결한다. 인간은 神의 모상이므로 신성하며 神이외의 存在에 의해 파괴되거나 거부될 수 없다.
우리의 神은 범신론의 신과 같이 막연한 신이 아니라 3位1體이신 位格的神이다.
신의 모창인 人間은 위격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관계성을 통하여서만 자기를 풍부하게 한다.
「바티깐」 공의회는 실존 철학이 갖는 「자기만의 고민」을 크게 타개하였다. 지금까지는 나와 신과의 관계만 강조하여 세상을 등한히한 결과 세상을 잃었다. 내 영혼만의 구제란 一面性을 지양하여야 한다. 인간의 位格이 기초가 되어 이 세계를 구성한다. 또한 공의회는 현세대의 약점을 해결하기 위한 구체적인 안을 나타냈다.
位格的 人間은 인간상호간에 마음과 마음, 육신과육 육신이 서로 교류함으로써 社會性안에서 자기를 충족시키고 성인이 될 수 있다. 사회의 기초, 家族과 각양의 사회속에서 각양의 문화를 건설하며 다양한 문화속에서 人間의 位格이 완성된다.
신의 모상을 통해서 永遠을 향하며, 地上은 거부 될 것이 아니라 世上안에서의 完成만이 인간의 長成이다. 神의 계시는 역사 안에서 役使한다. 아부라함에게 그의 백성전체를 축복하셨고 한 백성을 통해서 메시야 예수의 오심을 말했듯이 人類全體가 대상이 되어 구제된다.
교회의 權威·그리스도·神의 순으로 거부하여온 現代哲學은 인간은 自由를 누린듯 하였으나 그 속에 인간의 根據가 없어졌다. 공의회는 현대 심리학 정신분석학의 힘을 빌어보다 더 명쾌하게 인간상을 새로운 각도에서 밝혔으며 현대사상의 무의미나 절망에 희망을 주었다. 【文責 在記者】
◇改新敎에서 본 바티깐 公議會 / <강사 趙香錄 목사(서울草洞敎會牧師)>
①신교와 가토릭교회의 「에큐메니칼」은 동의 출발은 각각 그 「모티브」가 다르다. 프로테스탄교회는 교회의 선교라는 문제에서였고 그 주도적 역할은 해외선교사와 평신자단체지도자들로부터 시작되었으나 가톨릭교회는 요한 23세에 의하여 주도되였고 그 「모티브」는 요한 23세의 「바티깐」 공의회개회사에서 지적한 대로 「에큐매니즘」과 사목적 교회갱신이었다. 이것은 두 교회간의 교회체질로 보아서 하나님의 섭리로서 감사한다. 「바티깐」 공의회에 초청을 받은 프로테스탄교회와 동방교회 등의 옵서버들은 그들이 공의회기간 중 가톨릭교회 교부들로서부터 받은 정중하고 간격없는 대접은 실로 우리도 자기집안식구들이었다는 것이 일치한 견해였다고 한다. 모든 공개·비공개회의에 자유로이 참석하고 또 일주 일회씩 이 옵서버들의 의견을 듣는 기회까지 주었다고 한다.
③프로테스탄의 입장으로서 이번 「바티깐」 공의회의 헌장과 율령등을 보고 한마디로서 좋고 그름을 말할 수도 없고 그렇게 단정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그러나 「바티깐」 공의회 헌장의 가장 근간이 되는 제시헌장과 교회헌장 그리고 전례헌장 등은 분명히 성서의 권위에 귀일하고 교회는 하나님의 박성 그리고 전례는 불변한 진리와 비의(秘義)를 가변적인 형식으로 표현함으로써 신앙과 행위의 일치성을 더욱 깊이하자는 것과 사도직은 계시의 전달과 신앙의 성서적 교도에 둔다는 점 등을 골짜로한 점 그리고 헌장·율령의 표현이 「스콜라」철학을 불식하고 복음적 정열에 불탄점 등은 모든 프로테스탄교회들로서 본질적인 일치감을 가지게 한다.
아직도 교직의 제도에 있어서는 성모마리아의 교리적 위치에 있어서나 그리고 각각 다른 교회전통의 체질 등에 있어서 두교회간에 간격을 두고 있는 것도 있다.
④이제 가톨릭교회나 프로테스탄교회들의 「에큐메니즘」은 각각 교회의 자체갱신에 주력함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하나되심에 귀일하려는 소망을 안고 있다.
오늘은 우리가 서로 나누어짐을 스스로 고백하면서 종단을 보이는 하나의 교회를 이루어주실 것과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안에 모든 만물과 역사까지 통일될 것을 확신하고 함께 기도할 것이다.
■ 「救靈(구령)」만이 아니고 全人的(전인적) 救贖活動(구속활동)을
「惡(악)」外面(외면)이란 안될 말 바른 信仰人(신앙인)의 姿勢(자세)
대신학생이면 의례히 으젓하고 얌전하기만한 하고 세속사회와는 거리가먼 사람들을 연상하곤 했던 필자는 여기 「사제의 못자리」에서 14일 저녁에 벌어진 학장신부 축하회 광경을 보고 벌린 입을 한참동안 다물지 못했다.
「마이크」 앞에 나선 사회자는 「후라이보이」를 뺨칠 정도의 「유모어」와 「윗트」를 마음대로 구사했고, 휴식시간을 이용하여 연습했다는 관현악단(?)과 합창단이 선을 보이는가 하면, 한 신학생은 학장신부 취임식·농구·복싱 중개방송을 진짜 생방송을 하는 것처럼 「원·맨·쇼」를 멋찌게 해내기도 했다.
이러는 가운데 장내는 웃음소리가 그칠줄 몰랐고, 어느 평신자는 『아무래도 학생들이 소명을 잘못알고 신학교에 들어온것 같으니, 학장신부님께서는 이를 참작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즉석 제의까지 했다.
이렇게 놀 줄도 알고 공부할 줄도 아는 신학생들이기 때문에 이번 「심포지움」에서 그렇게도 의문투성이인 많은 문제들이 쏟아져 나와도 지나친 긴장감 없이 넘어갈 수 있었으리라.
■ 現世·肉身 賤視思想 排除코 世俗안에 天國을
▲現代社會서의 平信者의 使命 / <발표자 張翼 신부(文責은 記者에게)>
15일 오전 10시 30분 「현대사회에 있어 평신자의 사명」을 연재로 강연한 서울대교구장비서 장익 신부의 강연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교회헌장 제4장은 평신자의 본성은 「세속」적이 특수하다…평신자의 본분은 자기 개유적(個有的)인 성소에 응하여 「세속」활동을 추진하며 이를 하느님께 맞갖게 처리함으로써 하느님의 나라를 찾는데 있다… 평신자는 마치 누룩과 같이 「세속」을 안에서부터 성화하는데 이버지 하도록 천주께로부터 불리운다고 했다. 이와같은 「세속」은 평신자가 평신자로서의 구원을 받고 자기의 구원을 이뤄야할 「곳」이다. 세속은 소위 마귀와 육신과 합하여 영혼의 삼구(三구)를 이뤄 구원을 거역하는 부정적인 세속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자체를 포함하여 인간이 자체적으로 이루는 세계이며 시공간의 기연안에서 인간과 인간, 인간화되어가는 사물과 인간이 얽힌 가운데 사람이 이루는 사람의 집」을 말한다.
즉 구원의 대상이요 「구원의 곳」이 바로 평신자의 집인 세속이다. 구령(救靈) 활동이니 세속을 떠나야 성인이 된다느니 하는 사고방식은 사람에다 영혼을, 속세에다 사람을 마치 돌맹이를 물에 넣었다가 건졌다가하듯 하는 것을 상상케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안에서의 사람의 영세(永世) 즉 부활의 진리를 참으로 믿는다면 문자그대로의 온전한 사람이 결정적으로 구원됨과 동시에 영육적인 사람뿐 아니라 사람을 사람으로 이루는 또한 사람이 스스로 이루는 인간존재의 본곳인 세상과 그안의 만물도 구원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구령사업이 아니라 구인(救人) 활동이라는 말이 옳다. 그리고 온전한 사람이 가는 천당이라면 천당에도 세상이 즉 천당으로 부활한 세상이 계속될 것이다.
우리와 함께 구원돼야할 이 세상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신비안에서 새 삶으로 「건너가는」 「빠스카」의 신비, 흥해의 신비를 살고 있으며 하느님의 자비와 그의 결정적인 구원의 은혜는 우리를 「이미 되고 아직 안된」 「교회의 때」를 살게 한다.
우리의 세상은 우리와 함께 구원의 대상이 벌써 되었으나 역시 우리와 같이 최종적으로는 아직도 그 구원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있으며 이같이 「이미 되고 아직 안된」 때에 동적인 긴장 안에서 우리의 사명이 이뤄져야 한다. 먼저 세속을 부활의 신비안에서 보고 세속이 천주께로부터 사람의 거처로 창조되었을 뿐만아니라, 세속도 사람과 더불어 이미 구원을 받고 있다는 것을 확고하게 믿고 이 믿음을 삶으로 옮기는데 평신자의 사명이 있다. 그러므로 세속은 공을 세울 기회를 주는 것이 아니라, 구원된 사람이 의화(義化)됨과 같이 세속과 인간활동 그 자체가 성화(聖化)될 가치가 있다.
교회헌장은 또 평신자는 모든 일이 항상 그리스도를 따라 이뤄지고 자라도록 그리스도를 남에게 나타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천 주께서는 『우리 모두가 일치하여… 성숙한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충만하신 모습의 경지까지 이르게 하시려』하며(에페소서 4장 13절)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아들이 나타나기를 갈망하고 있다』(로마서 8장 19절) 즉 우리 모두가 구원돼야 비로소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충만하신 모습 완전하신 모습이 나타나고 모든 피조물까지도 갈망하던 이 발현에 참여하게 된다는 뜻이다.
구원이란 원죄로부터의 구원 즉 일종의 원상복구를 뜻하는 것이 아니며, 그리스도의 충만하신 모습을 타낸다함은 창조와 구속이란 두 활동에 우리 모두가 참여하고 강생과 부활이란 두 신비에 다 참여함을 뜻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노력과 사업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입각했을때, 부활의 신비를 강생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발현케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예로 우리 두뇌가 연역적(演繹的) 추리로 자아내는 수학을 가지고 귀납적(歸納的)으로 알려진 물리적 현상을 질문하면, 놀랍게도 뜻있고 모순없는 물리론을 얻고, 이 물리론을 응용시켜보면 다시 유효한 성과를 얻게 된다.
이 사실은 인간과 사물의 세계가 경험을 초월하여 공통하고 있다는 것과 사물이 차차 인관화 되어 우주가 더 투명해지고 하나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한 수학 방정식을 옳게 알아들을때 나는 창조의 시초부터 천주께서 내게 주시려던 모습에 그만큼 가까워지고 그리스도의 온전한 인간모습을 닮아가며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 나를 창조한다.
그것은 결국 온전치 못하고 상처입은 「이미되고 아직 안된」 우리의 모습을 죽음과 죄를 이기신 그리스도의 모습에 보다 더 가깝게 만들기 위한 것이며 그리스도와 함께 강생하고 부활하는 것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 또한 우리안에 온전치 못한 것이 있을수록, 그리스도를 안닮은 것이나 나쁜것 죄스러운 것이 있을수록 더욱더 이를 구원하고 「그리스도의 충만하신 모습」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 평신자의 사명이다. 세속이 하느님의 고비를 거역하면 거역할수록 이를 피하거나 버릴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의 노력의 대상으로 더욱더 사랑해야 한다. 구원이 필요없는 사람에겐 교회가 필요 없다. 무슨 일이 있든 참다운 평신자는 세속을 끝내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영세(永世) 창조에 참여할 사명을 지니고 있다. 이미 그리스도안에 이뤄진 영세가 온전히 제모습을 달성하여 나타나도록 성사(聖事)를 하는 것이다. 천국을 여기서, 세속안에서 이루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때가 차면 그 계획을 실행하여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시려는 것」(에페소서 1장)이라고 하신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오늘날 「이미되고 아직 안된」 「교회의 때」를 바라고 행해야하는 궁극의 목적이요, 사명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