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 독일 NC】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에서 서독을 재건한 콘라드 아데나워 수상이 19일 「렌돌프」의 자택에서 9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4월 초순께 「인푸렌자」와 기관지염에 감염되어 갑작스레 건강이 악화되어 마침내 서거했다.
유럽재건 수십년에 걸쳐 전후 독일을 지배해 온 그는 긴 정치생애를 「가톨리시즘」에 바탕두어 실천한 훌륭한 신자이기도 하다. 그는 죽는 날까지 독일 국회의원으로 활약했고 기민당(基民黨) 당수를 역임한 바 있으며 마지막까지 당원으로 있었다. 서독의 두 사람의 지도인물중 하나로 꼽히는 아데나워 전 수상은 소련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최첨단을 달렸다. 그러나 수상직을 물러난 후에 그는 중공이 서양의 가장 강대적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면서 소련과의 관계를 밀접히 할 것을 촉구했다.
아데나워의 정치생활 중요목표 중 하나는 소련 때문에 양단된 독일의 통일이었고 또 유럽의 단합을 위해서도 노력을 아까지 않았다.
아데나워가 정치인으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는 73세때부터이다. 그는 1876년 「쾰른」의 말단 시청직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가톨릭학교에서 공부를 했고 나중에는 「프라이버그」 「본」 「뮤니히」 각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여 고향에 돌아와 법률가로 행세했다. 급기야 「바이말」 공화국 당시 유력한 중앙당의 지도자가 됐고 1917년 「쾰른」시장으로 선출되어 1933년까지 시장을 역임했다.
철통같은 의지를 가진 아데나워는 국가사회주의에 대해 초창기부터 강력히 부정했다. 1933년 「나치」에 의해 정치계로부터 축출당하여 「게스타포」에 의해 억류됐다. 종전전 12년간 그는 고향인 「쾰른」에서 완전히 햇빛을 보지 못했다.
1945년 연합국은 전쟁으로 파괴된 「쾰른」 복구를 위해 아데나워를 돕기로 했다. 그는 다시 시장직을 재임했으나 세상은 요지경이라 몇개월 되지 않아 그가 탐탁치 않게 여겨오던 영국의 한 장교로부터 시장을 탈직당했다.
1945년 그는 새로 발족된 기독교민주당 중요 당원이 됐고 1950년에는 당수가 됐다. 1949년 전후 제1차 총선거에서 연방국회의원에 당선되고 한달후, 종전후 초대 수상직에 올랐다.
1953년 기민당이 연방국회에서 처음으로 최대다수석을 차지함으로써 그는 수상직에 재선됐다.
아데나워 수상은 연합국의 발전성 없는 서독경제지배를 목격하고 유럽의 단합이라는 그의 주관에 따라 「유럽 석탄철강단체」 「유럽경제협조의회」 「유럽임금조합」 UN 기구 등 독일을 유럽의 여러 연맹에 가입시켰다.
아데나워 수상은 1959년 초기부터 수상직에 많은 위협을 받아왔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1963년 루드빅 에르하르트씨가 뒤를 이을때까지 수상직을 견지했다.
아데나워는 전생애를 가톨릭적으로 바친 열심한 신자였고 그의 아들 바오로는 신부이다. 미사참여를 궐한 적이 한번도 없다고 한다.
가톨릭 신앙이 어려운 이 세상에서 균형된 생활을 영위하도록 도왔다고 강조한 적이 여러번 있다.
아데나워 수상은 항상 세상의 투쟁은 크리스찬에 근거를 둔 민주주의와 「집단적」 인물주의 사이에서 벌어진다고 강조했다. 「바티깐」과의 접촉도 또한 게을리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