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滅(불멸)의 良心(양심) 토마스 모어의 生涯(생애)
삶 · 사랑 추구한 人間主義者(인간주의자)
헨리 8세 離婚(이혼) 반대로 反逆罪(반역죄)에 몰려
信仰(신앙)과 良心(양심)에 殉敎(순교)한 「아이로니칼」한 生涯(생애)
「수염이 잘리지 않게…」. 斷頭(단두) 직전까지 「유모어」
금년, 세계적으로 著名한 「아카데미」영화 최고작품상을 탄 (그밖에 5개 부문에도 得賞) 「사계절의 사나이」는 토마스 모어의 一代記를 그린 것이다. 당대 영국의 석학이며 궁전判官이었던 모어가 헨리 8세의 專橫에 반항하여 끝내 그의 신앙과 양심을 순교로서 지키기까지 내적갈등을 묘파한 동 영화는 종교영화의 극치란 評을 받고 있다. 이 기회에 토마스 모어의 생애를 돌아봄도 의의가 있겠다. (편집실)
『내 아들 로퍼! 광야를 정복하였으니 우리 주님께 감사드리라.』
토마스는 그가 사형당하기 얼마전 영국왕 헨리 8세의 명령으로 「람벹」궁전으로 불리워갓다. 그날 아침 나룻배 안에까지 따라나온 그의 사위 로퍼에게 이와같이 말했던 것이다.
붉은 황무지에 십자가의 깃발을 꽂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그는 그의 내면에 헛되게 뿌려진 인간다운 유감을 완전히 정복했다는 뜻일 것이다. 그 옛날 「에덴」의 동산이 잡초로 우거진 황무지로 변해 버렸대 해도 그는 새로운 天國의 길을 그 마음 속에서 그 신앙 속에서 그 양심 속에서 다시 찾아내었던 것이다.
일찌기 英國이 낳은 가장 위대한 德行者 토마스 모어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는 바로 「밀크스트리트」에서 시작한다. 1478년 2월 궁내(宮內) 판사인 토마스 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 모어를 「성 안토니」의 學校에 보내었다. 이 有名한 學校에서 모어는 그의 나머지 생애에 重要한 영향을 끼칠만한 건전한 기초를 닦았다.
1496년 2월 12일 그가 18세가 되었을 때 法律 공부를 하기 위해 「링컨」법학당의 學生이 되었다. 얼마후 학생당(STUDENT - INN)으로 옮겼는데 이곳은 모어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으로 지금은 이곳에 모어의 石像이 높이 서있다.
1501년 그는 「칼튜지안」會의 神父가 되기위해 「차트 하우스」(CHART HOUSE)에서 거처했었다. 「칼튜지안」의 엄격한 규칙을 스스로 지켰다. 그러나 1505年 그 自身에겐 성직자나 수도원의 생활을 할 성소가 없음을 깊이 깨달았다. 성소란 人間의 온갖 지성과 언어로써 說明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修道院을 등지고 세속의 生活을 택한 것은 세속이 명예나 재산을 탐해서가 아니라 보다 더 거룩한 神의 부르심이 修道院 담장 밖에서임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自身을 편태하고 머리털로 엮어진 속내의(內衣)를 입는 등의 갖은 고행의 世界를 떠나 그 당시 人間主義者 애라스므스와 友情을 맺고 生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시작했던 것이다.
참된 삶과 사랑, 그는 새로운 삶의 주변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많은 作品들을 썼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作品은 유토피아(UTOPIA)이다. 이 책은 인문주의를 論한 英國의 作品들중 첫째번 책이며 現代의 사회주의에도 불가결의 한 바탕이 되었다.
1505년 모어는 제인 콜트와 결혼하여 마아가렡 엘리자벹 세실리라는 세 딸과 아들 존을 낳았다.
수년후 제인 콜트와 死別하고 앨르시 미들튼이라는 그 자신보다 일곱 살이나 손위인 女子와 재혼하여 「런던」의 남서부 「첼시아」로 이사했다.
1529년 왕 헨리 8세는 모어를 英國의 대법관으로 임명하여 왕비 캐트린과 이혼하고 안 볼레인과 정식 결혼 할 것을 도와달라고 청했다. 왕과 모어는 평소부터 친우지간이었으므로 왕은 모어라면 자기의 뜻을 받아주리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괘씸하게도 모어는 안 볼래인이 王后가 되는 것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결혼이 그리스도 교의(敎義)에 위배되는 정당한 결혼이 될 수 없다고 완강히 거부했다.
마침내 그는 피엘탑의 한 습기차고 어두컴컴한 추운 감방에 갇히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英國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경치를 창틈으로 내다보며 아이로닉하게도 영국의 역대의 罪人들 중에서도 가장 극심한 고통을 받았던 것이다.
그는 그의 아내의 애원에도 生命을 좌우하는 재판에서도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마침내 재판장은 이렇게 질문했다.
『당신은 이 나라의 모든 敎會와 귀족보다 더 현명하고 양심적이려 하십니까?』
『각하여 나는 당신이 말하는 한분의 主敎 대신에 수많은 나의 聖人을 가지고 있읍니다. 당신이 말하는 한 의회 대신에 나는 千年間의 公議會를 갖고 있읍니다. 또한 왕국 대신에 나는 프랑스와 또한 그리스도 敎會의 모든 왕국을 가지고 있읍니다.』라고 대답했다. 재판장에서 나룻배를 타고 감옥으로 되돌아갈 때, 시종 간수의 시퍼런 도끼날이 모어 쪽으로 향해 기울어지고 있음을 바라본 구경군들은 그가 有罪의 판결을 받았구나 하고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때의 그 도끼는 지금도 그 탑의 관리인의 사무실에 보관되고 있는데 이는 징벌에 대한 왕실의 권한을 상징하는 것이다.
死刑場으로 끌려가는 도중 한 女人이 그에게 술을 권햇으나 그는 이를 사양하였다. 「카나」에서 축복을 받았지만 「칼바리」에서 식초로 變해버린 예수의 식초를 생각해서였다.
바로 처형을 받으려는 순간 그는 잠간 멈추어 달라고 청했다. 그러자 그는 아주 유모어를 띈 표정으로 턱수염을 한 옆으로 밀쳤다. 턱수염이 함께 잘리워지지 않도록 - 그것만은 결코 반역죄를 짓지 않았는고로.
그렇게 그는 영국의 아들중 가장 고상하게 죽어간 한 사람이다. 그의 遺骸는 「캔터배리」 「성 둔스트」의 敎會에 안치되었다.
金慶男(大倫中高校 敎師)